정말 고마워서 쓴 글

메이저 19번 카드. 해

by 시애

열일곱, 친구와의 약속 장소에 가다가 멈춰 서서 전화했다.

“나 좀 늦겠는데?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여기 어딘지 잘 모르겠어.”

“그래? 옆에 뭐가 보여?”

“주차된 차.”

“.... (당혹)”

“.... (멘트를 잘못 친 것을 깨달음)”

“... 천천히 와라.”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으나 공간지각능력에는 진보가 없다. 거슬러 가보면 중학생 때도 길치에 방향치였고(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위로 가던 중이었는지 아래로 가던 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도 그랬다(걷다가 뒤로 돌면 갑자기 길이 낯설어 매번 긴장모드에 돌입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도 입구 네 개와 우리 집을 편안하게 연결 짓는 데 일 년쯤 걸렸다. 하지만 세련된 주민으로 보여야 하므로 이건 비밀이다. 지하 2층 입구에서는 왼쪽 왼쪽 왼쪽, 지하 1층에서는 오른쪽 오른쪽, 하며 혼자 속으로 중얼중얼하는데 딴생각하다 놓치면 운동한다 치고 그냥 조금 더 걷는다.



아니, 실은 딴생각하다가 놓친 거라고 할 수도 없지. 긴장해서 집중하면 집중한 채로 길을 잃는다. 울산 동구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울산 북구로 출장을 갔는데, 분명히 울산 북구로 출장을 갔으나 어쩐지 경주가 나왔다. 경주에 다녀왔노라 고하니, 이후로 선배들이 어디 갔다 오라는 종류의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출근하다 길을 잃은 적도 있다. 하지만 세련된 직장인으로 보여야 하므로 잘못 내린 정류장 앞 스타벅스에서 요거트를 사서 아침을 사러 일부러 다녀온 척 출근했다. 학교에서 현장 체험학습을 가면 우리 반 맨 앞에서 걷는 동안 내내 두피가 팽팽해지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하필 1반 담임이라 학년 전체의 맨 앞에 설 때가 최악이다. 나폴레옹도 아니고 의기양양하게 “이 산이 아니었다!” 할 수는 없으므로, 똑바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내 눈치를 계속 본다.






그래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건 은혜로운 인공위성이 나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저 하늘 어디선가 너는 나를 지켜보고 있겠지. 가만한 눈길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길을 잃고 너를 찾으면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겠지.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쓸 수 있다. 인공위성이 그 길이 아니라고 걷는 족족 잔소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아직도 해외여행 중일 거야. 교직을 버리고 (강제로) 방랑의 길을 택한 여행가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영원한 해외여행의 위기에서 탈출한 나는 길을 찾는 능력뿐 아니라 내게 모자란 많은 능력을 기계에 기대며 일상을 산다. 나는 언제든 정확한 시간도 알고 있고, 계산도 신속하게 하며,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들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치타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으며,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메이저 19번 카드인 ‘The Sun’ 카드에는 포동포동한 아기가 환하게 웃으며 깃발을 들고 있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났을까? 카드를 좀 더 살펴보면 늠름한 백마가 아기를 태워주고 있고, 튼튼한 돌담 위 해바라기와 진지한 표정의 커다란 태양도 아기를 지켜보고 있다. 말과 돌담과 해바라기와 태양 모두 말없이 아기를 지켜주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힘을 받아 아기는 제 몸보다도 커다란 붉은 깃발을 흔들며 환히 웃을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들은 말과 돌담과 해바라기와 태양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인간은 마침내 제5의 뇌를 갖게 되었다. 대뇌, 소뇌, 중뇌, 간뇌에 이은 손바닥 위의 ‘외뇌’. 심지어 이 작고 얇은 외뇌-흔히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나의 외장 메모리-를 통하면 다른 기계들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드디어 인간은 종을 넘어 말이 통하는 상대를 찾았다. 스마트폰만이 아니다. 내 생활을 둘러싼 모든 기계가 발전을 거듭하며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아이언맨이 된 것만 같다.






그리고 기계들 뒤에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불편과 필요를 헤아려보는 마음과 피, 땀, 눈물의 시간이 기계 안에 고여 있다. 밤새 0과 1로 썼을 러브레터들을 생각한다. 0과 1에 담긴 마음들이 나의 백마이며 돌담이며 해바라기며 태양이고, 덕분에 작고 작은 나도 붉은 깃발을 크게 휘두를 수 있다.



오늘도 코딩 중이실 그대들의 시간에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오늘도 (강제) 역마살로부터 저를 구해 집으로 인도해 주셨네요. 부디 칼퇴의 날들 되시길.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