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17번 카드. 별
《비스타즈》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토끼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늑대의 이야기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과 닮은 조합이지 않은가. 비슷한 조합의 커플이되, 《주토피아》가 토끼 시선의 재기발랄한 버전이라면 《비스타즈》는 늑대 시선의 어두운 버전이다. 인간이 크루아상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생각하면 왜 어두운 버전이 되는지 와닿을까. 고소한 빵 냄새에 본능적으로 침이 넘어가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터다.
이야기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어울려 사는 세계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급식은 초식과 육식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육식 급식이라 해도 우유와 달걀이 더 나오는 정도다. 우리 반 친구와 같은 식감의 살코기를 대놓고 씹을 수는 없으니까. 사이좋은 척하고 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무리가 서로를 무시하거나 두려워한다. 이를테면 말이지, 인간과 멸치가 진심으로 사이좋게 지내기란 도무지 힘든 법이다. 멸치는 자기 조상을 말려 먹고 우려먹고 볶아먹던 인간 조상의 과오를 늘 의식하고 있을 것이고, 인간 입장에서는 어쩌다 멸치와 다투기라도 하면 고 조그만 입을 움직이며 나를 욕하고 무시할 텐데, 아오, 어쩐지 더 열받아. 그런데도 늑대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토끼와.
그들이 사는 세계에도 암시장이 있다. 비공식적이면서도 공공연하게 초식동물의 살코기가 판매되는 곳이다. 학교 안에서야 숨기고 지내지만, 사회에서는 초식동물을 향한 탐욕과 육식동물을 향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부 측에서도 암시장의 존재를 훤히 알고 있지만 단속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육식의 욕구를 해소하여 육식동물 무리의 공격성을 조절하는 필요악으로 여긴다. 사회의 표면적 평화를 위하여 먹히는 동물들의 동물권은 철저히 무시된다.
《비스타즈》는 주인공 늑대의 눈을 통해 토끼의 삶을 보여준다. 눈처럼 하얀 털과 빨간 눈을 가지고 있으며, 꽃을 잘 가꾸고,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 유일무이한 토끼.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말았으므로, 늑대는 이제 그 토끼의 고기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육식동물 학생들도 같이 과제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던 같은 반 초식동물 친구의 살덩어리를 맛있게 먹기는 힘들 것이고, 나도 이제 우리 가족이 키우는 말티즈의 고기는 상상할 수도 없다. 내가 어제 마신 우유가 어느 송아지 몫을 뺏은 것인지, 오늘 국 안에 들어있던 살코기의 원래 주인이 어떤 눈빛을 가졌는지 알면서도 그들을 기꺼이 먹을 수 있을까. 모든 생명체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걸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으므로, 나는 비극적인 죽음 대신 육질의 식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익명성은 시체에서 삶을 지우고, 꺼지지 않는 냉장고는 제 몸에 들어찬 사체들을 신선하게 보존한다.
우리 집 강아지처럼 기쁨과 아픔을 느끼는 유일한 존재라 생각하면 비로소 다른 집 개들이 보이고 골목의 고양이들이 보인다. 주인을 찾지 못해 안락사당하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그제야 들린다. 사육되는 가축들이 식품과 제품을 넘어 조금씩 동물로 보이고, 닭이 웃는 얼굴로 닭다리를 들고 있는 맥시칸치킨의 마스코트가 무서워진다.
그러면서도 동물제품들을 잘 먹고 잘 쓰는 나와는 달리 동물권에 대해 정말로 깊이 고민하고 배려하는 분들이 요즘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늘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소수이지만 그분들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의 잔혹한 민낯을 낱낱이 꺼내어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려 사료나 퇴비가 된다. 라쿤은 살아있는 채로 머리 가죽까지 벗겨져 몸부림친다. 스무 마리의 거위가 마취도 없이 가슴 털을 뜯겨야 패딩 하나가 완성된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동물들은 항의조차 제힘으로 할 수 없다. 당장의 편리함보다 동물의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하는 분들, 인간의 욕망에 유린당하는 동물을 긍휼히 여기는 분들만이 힘없는 생명들의 희망이다.
메이저 아르카나 17번 카드의 이름은 ‘별’이다. 그리고 ‘별’ 카드의 별칭은 ‘희망’이다. 주위가 캄캄해야 비로소 별이 보인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카드의 그림에서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은 방향을 알려주는 별인 북극성이다. 아직 사방이 어둡지만, 그래도 내가 나아갈 방향은 이제 알 것 같은 것. 그것이 희망이다.
많은 사람이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축산 산업이나 모피 산업은 건재하며,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주류 사회에서 좀 유별난 존재로 치부되기도 한다. 암울한 상황에서 어렵게 목소리를 내보아도 아무렇지 않게 동물제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바꿀 수 있는 게 맞긴 한가 혼란스러울 때도 있으시겠지. 그래도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저마다 조금 덜 소비하는 순간들이 모이면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의 내 수고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순간 하나하나가 모두 희망이다. 광장의 촛불들이 그랬듯이.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오후는 카페라테 대신 따끈한 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