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담백한 사람을 사귄다는 건
무엇이든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시대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우리는 뭐든 쉽게 사고 또 버린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데이팅 앱에서 손가락만 몇 번 두드리면 하룻밤을 위한 기간제 애인을 몇 명이고 만들 수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대만에서 만난 지금의 애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같은 사람이다.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 출신이지만, 화려한 도시보다는 자연풍경이 있는 시골을 좋아한다. 남들 다 하는 SNS는 전혀 하지 않으며 그 시간에 혼자 판타지물을 보곤 한다. 새 옷보다는 구제 옷을 선호하고 손편지 쓰는 걸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 보다는, 자신이 전공한 그림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결혼정보회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이상적인 남자'의 조건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내 애인은 남들은 발견하기 어려운 많은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당당하게 의견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을 얇고 넓게 사귀기보다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한 마디로 그를 표현하자면 잔잔하고 담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며칠을 고민해 찾아낸 단어지만 여전히 100% 맘에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인의 매력을 자랑하고 뽐내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그런 그의 숨겨진 면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그가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가 빌려줬던 만화책이었다.
내 애인은 만화책을 좋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전집을 모아두곤 했다. 그중에서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작가의 'SUNNY'라는 만화책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나는 흘러가는 말로 '한 번 보고 싶다, 궁금하네~.'라고 영혼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기억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그냥 막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우리의 다음 만남에 본인이 가장 아끼는 책을 가져왔다.
내가 흘러가는 듯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 것도 놀랐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그 책 표지에 덮여있던 투명한 책 커버였다. 기성품으로 이미 만들어진 책 커버를 사서 끼운 게 아니라 직접 커버용 코팅지를 사서 일일이 가위로 잘라 만든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본인이 사랑하는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뭐든 쉽게 사고 버리는 요즘 세상에 스스로 직접 책 커버를 만드는 남자, 그때 '이 사람 참 매력 있다.'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가있는 지금도 그 사람은 여전하다. 화려한 이벤트를 해준다거나, 비싼 선물을 주기보다는 정성이 담긴 그림과 직접 쓴 손편지를 한 달에 한 번씩 꼭 보내준다. 서로의 개인적인 시간에는 연락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라 잦은 연락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는 잘 잤어? 그리고 잘 자, 라는 아침인사와 저녁인사는 잊지 않는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하게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는 내 애인. 이 글로서 그동안 못 했던 감사함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