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나고 2년 해외장거리 하기
나와 대만인 남자친구는 현재 대만-체코 해외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 한국인인 나는 대만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대만인인 남자친구는 체코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중이다. 남자친구의 유학 때문에 우리는 사귄 지 2주 만에 2년 해외장거리를 하게 되었다.
이런 기묘한 사정을 나의 가족들은 포함한 내 대부분의 지인들은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50:50으로 갈린다. '그렇구나,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응원해주거나 혹은 '너 시간낭비하는 거 아니야?'라며 걱정해주거나.
후자의 입장인 친구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오랜 만남을 갖다가 해외 장거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2주라는 짧은 시간을 만나고 2년이라는 시간을 해외장거리를 하다니.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워낙 평소에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연락에도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2년만 조금 바쁘게 지내면 큰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비는 해외장거리를 시작한 바로 그다음 날 찾아왔다. 남자친구가 떠나고 막상 혼자가 되어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내년도 아닌 무려 내후년에나 돌아온다니! 게다가 코시국이라 중간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이렇게 만나다가 끝내 헤어지게 되면? 그럼 내 2년을 낭비하는 것 아닌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알량한 자존심에 그런 나약한 모습을 남자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연락을 할 때에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잘 지내는 척을 하곤 했다. 슬프거나 우울한 일이 있어도 절대 털어놓지 않았고, 내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연극을 이어나가기 위한 비용은 컸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공허해져 갔다. 연극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남자친구의 연락에 집착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 공허한 마음을 남자친구의 연락으로 채우려는 것 같았다.
그 결과 남자친구가 일어나는 오후 2~3시만 되면 남자친구의 연락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남자친구의 연락이 조금만 늦어지면 불안해졌고 휴대폰만 붙들고 있다 잠들곤 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게 잘못된 상황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꼬여가던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계기는 아주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연락이 없는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수업 스케줄이 딱딱 정해진 한국과 달리, 남자친구가 있는 학교는 예술학과 특성상 다양한 워크숍이 시도 때도 없이 있었고, 남자친구가 기존에 알려준 시간표는 사실상 무쓸모라고 하면 좋을 정도로 맞지 않았다.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이 나는 남자친구의 정체 모를 워크숍이 얼른 끝나길 바라며 나는 하루 종일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날은 그동안 쌓여있던 짜증이 정말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너무 많은 워크숍도 짜증 나고, 그 워크숍 때문에 자주 사라지는 남자친구에게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사실 남자친구가 계속 연락이 없게 되면 그냥 헤어지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남자친구를 위협하기 위함이거나 화가 나서 막 내뱉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냥 헤어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정말 타이밍 좋게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我下課了!(수업 끝났어!)"
그 문자 하나에 정말 폭발 직전의 상태였던 마음이 갑자기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의 그 간단한 메시지 하나에 모든 안 좋은 마음들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순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언제부터 이런 작은 메시지 하나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었나, 라는 생각이 퍼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디 로봇이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감정적 변화가 적었고 뭐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나였는데, 어느 순간 그런 내가 남자친구의 메시지 하나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제야 나는 발견한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날 밤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모습을 이렇게 바꾸어나가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만큼 중요한 관계인가? 한참을 고민한 결과 대답은 No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싶은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로 No였다.
결국 나는 이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실 방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연애의 국룰이라고 할 수 있는 '혼자 잘 지내기'였다. 그것이 운동이든, 일이든 또는 공부든 무엇이 되었든 '나' 스스로를 위해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운동을 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억지로라도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고됨' 그 자체였다. 평일에는 퇴근 후, 그리고 주말의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와 운동에 할애하다 보니 매일 집에 가면 곯아떨어지기 바빴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역시나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비록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쁜 삶에 적응이 되었고, 무엇보다 나를 위한 그 시간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전과 달리 남자친구의 연락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연락이 없어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틈을 이용해 내 할 일을 하곤 했다.
확실히 나와 남자친구의 연락 빈도는 그전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오히려 그 짧은 연락 시간을 더욱 소중히 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전에는 할 얘기가 없어서 종종 어색한 침묵이 감돌곤 했지만, 서로가 바빠지면서 매일매일 이야기하고 싶은 일들이 쌓이고 또 쌓여갔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즐거워지고 풍부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서로가 바빠 연락이 되지 않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남자친구와 나는 본인의 일을 하는 중이다. 남자친구는 최근에 알게 된 친구의 영화 포스터를 작업하고 있고, 나는 그동안 미루었던 글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해외 장거리 연애에서 연락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시차가 있는 해외 장거리의 경우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 아무리 그래도 연애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