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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만아웃사이더 Mar 31. 2022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잔잔하고 담백한 사람을 사귄다는 건



 무엇이든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시대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우리는 뭐든 쉽게 사고 또 버린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데이팅 앱에서 손가락만 몇 번 두드리면 하룻밤을 위한 기간제 애인을 몇 명이고 만들 수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대만에서 만난 지금의 애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같은 사람이다.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 출신이지만, 화려한 도시보다는 자연풍경이 있는 시골을 좋아한다. 남들 다 하는 SNS는 전혀 하지 않으며 그 시간에 혼자 판타지물을 보곤 한다. 새 옷보다는 구제 옷을 선호하고 손편지 쓰는 걸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 보다는, 자신이 전공한 그림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결혼정보회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이상적인 남자'의 조건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내 애인은 남들은 발견하기 어려운 많은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당당하게 의견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을 얇고 넓게 사귀기보다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마디로 그를 표현하자면 잔잔하고 담백한 사람이라고   있겠다. (며칠을 고민해 찾아낸 단어지만 여전히 100% 맘에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인의 매력을 자랑하고 뽐내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그런 그의 숨겨진 면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그가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가 빌려줬던 만화책이었다. 


 내 애인은 만화책을 좋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전집을 모아두곤 했다. 그중에서 마츠모토 타이요라는 작가의 'SUNNY'라는 만화책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나는 흘러가는 말로 '한 번 보고 싶다, 궁금하네~.'라고 영혼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기억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그냥 막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우리의 다음 만남에 본인이 가장 아끼는 책을 가져왔다.


 내가 흘러가는 듯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 것도 놀랐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그 책 표지에 덮여있던 투명한 책 커버였다. 기성품으로 이미 만들어진 책 커버를 사서 끼운 게 아니라 직접 커버용 코팅지를 사서 일일이 가위로 잘라 만든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본인이 사랑하는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뭐든 쉽게 사고 버리는 요즘 세상에 스스로 직접 책 커버를 만드는 남자, 그때 '이 사람 참 매력 있다.'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가있는 지금도  사람은 여전하다. 화려한 이벤트를 해준다거나, 비싼 선물을 기보다는 정성이 담긴 그림과 직접  손편지를 한 달에 한 번씩 꼭 보내준다. 서로의 개인적인 시간에는 연락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라 잦은 연락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는 잘 잤어? 그리고 잘 자, 라는 아침인사와 저녁인사는 잊지 않는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하게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는  애인.  글로서 그동안  했던 감사함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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