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있습니다.
-생각처럼 되지 않은 세부에서의 2주.
올케와 함께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왔다.
작년부터 올케가 첫째 조카의 영어 공부를 위해 세부 한달살이를 하고 싶다 했다.
7살짜리 첫째 조카와 17개월 된 둘째 조카를 데리고 혼자 세부 한 달 살기가 가능할까 막막하던 찰나,
"나도 가고 싶다."라는 내 말에, "그럼 형님 진짜 같이 가실래요?"라며 제안했다.
시누이와 올케의 해외여행이라니.
처음엔 빈말인가 싶었지만, "누나는 와플가게에 출근해야지!"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던 남동생을 올케가 구슬리고 구슬려 결국 일주일 세부 여행이 가능해졌다.
원래는 3월 11일 나 먼저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짜증이 늘어난 두 아이들과 3일 정도 있다 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화요일 밤 올케가 조심스럽지만 간절한 말투로 물었다.
"형님, 한 주만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그렇게 나는 귀국일을 3월 16일로 변경했고, 아직 세부에 있다.
흔쾌히 알겠다 했지만, 점점 강도 높아지는 조카육아에 '아, 일정대로 갈 걸 그랬나' 후회가 살짝 되긴 했다.
세부에 와있으면서 올케와의 세부 여행에 대해 브런치 북 연재를 시작해 볼까 했다.
왠지 '시누이와 올케'의 해외여행은 흔하지 않은 소재라 아주 재밌게 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었다.
하지만 참,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세부에 오자마자 갑자기 시작된 알레르기성 비염에 코가 막혔다가 콧물이 줄줄 흘렀다가를 반복하며 두통에 시달렸다. 몇 번이나 노트북을 열었지만 도저히 써지지가 않았다.
필리핀을 여행하기엔 가장 좋은 3월이라 하지만 내리쬐는 햇빛아래 30분만 나갔다 와도 얼굴은 시뻘겋게 닳아 오르고 몸뚱이는 지쳐버렸다.
"고모 싫어! 엄마 좋아! 고모 저리 가!"라며 떼쓰는 첫째 조카와 택시만 탔다 하면 몸을 비틀며 울어대는 둘째 조카에 근처 마트만 갔다 와도 진이 빠졌다.
한국에서도 가끔 장난스러운 말투로 "고모 싫어!"를 하던 조카라 웃어넘겼지만, 여기 와서 매일 듣다 보니 정말 상처가 되었다.
서러움이 목 끝까지 차고 넘친 어느 날 J와 통화하다 울기도 했다. J는 그럴 거면 뭐 하러 따라갔냐고 바보천치라 놀려댔다.
사랑스러운 조카들과 좋은 추억 많이 만들 기대감에 따라온 건데 뜻대로 되지 않은 듯 해 속상했다.
그날그날 순간의 감정을 메모지에 기록하는 걸로 글쓰기 계획을 변경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적어 둔 감정을 조금씩 꺼내보며 글을 써야겠다.
지금은 소인배처럼 7살짜리에게 삐져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첫째 조카에 대한 서운함과 속상함도 웃어넘기며 추억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