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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Mar 31. 2023

외할아버지의 입술이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다.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보고 싶어요.

 내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위는 '입술'이다.

 건조하다 싶으면 금세 터버리고,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반복되면 입술에 생긴 수포를 시작으로 위염, 장염, 감기에 걸리곤 한다. 

 술을 고주망태로 마신 새벽, 씻을 힘도 남아있지 않아 대충 클렌징 워터로 얼굴만 닦아내고 자려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 립밤은 꼭 바르고 잘 입술 케어에 늘 진심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입술이 바짝 마르고 건조해짐을 느끼며 이 왔음을 실감했다.

 집에서 쓰는 일반 립밤으로는 까칠하게 일어난 성난 입술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주 가던 단골 약국에 갔다. 30대 중후반이 되면서 약국 쇼핑이 재밌다. 새로운 약이 들어온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전에 이곳 약국의 약사님께 추천받은 립밤을 쓰고 빠른 시일 내에 입술이 말끔해졌던 기억이 있어 일부러 들른 약국인데, 그 약사님이 계시지 않았다.


 "입술이 부쩍 따갑고 오돌토돌하게 일어났는데 혹시 추천해 주실 연고 있을까요?"

 "아... 음... 봄이라 건조해서 그래요. 그냥 일반 립밤 잘 챙겨 바르시면 낫지 싶은데... 허허허"


 이것저것 추천해 주시는 것보다 갖고 있는 약을 꾸준히 잘 사용해 보라 권하는 약사님을 만나면 왠지 더 믿음이 가곤 하지만, 새로운 약을 추천받고 싶어 안달 난 상태로 간 약국에서 막상 추천받지 못하니 아쉬웠다.

 있는 립밤 잘 발라보라 추천해 준 약사님을 의식하며 아무것도 사지 않고 약국을 일단 빠져나와 올리브영으로 향했다. 이전에 추천받았던 그 립밤이 올리브영에서도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능이 뛰어난 걸 알지만, 이 립밤을 마지막으로 구입한 건 꽤 오래된 작년 9월이다. 

 요양병원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쓸 립밤을 사 오라던 엄마의 심부름에 망설이지 않고 집어 들었던 그 립밤.

 '비판톨'




 작년 여름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외할머니는 본인이 힘들어도 집으로 외할아버지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하셨다.

 코로나 감염 위험이 높아 집보다는 요양병원에서 전문 요양보호사분에게 케어받으며 외부인 접근 차단을 받는 게 면역력이 약해진 외할아버지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의사의 말에 겨우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동의하셨다.

 우리 모두는 자식 된 도리로써 요양병원에 외할아버지를 모신 것을 죄스러워했지만 각자 바쁘게 생활하며 케어에 소홀해지는 것보다는 전문 요양병원에 맡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외할아버지가 쓸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립밤만 못 샀네, 제일 좋은 걸로 사와. 이번 주에 외할아버지 갖다 드릴 거니까."

 "걱정 마! 립밤은 내 전문 분야야!"

 퇴근하고 들린 올리브영에서 고르지도 않고 바로 집어든 립밤이 비판톨이었다.

 약사님의 추천으로 처음 썼을 때 정말 일주일 만에 튼 살 가득한 내 입술이 부드러워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오자마자 사 온 비판톨을 집어 들고 엄마에게 이 립밤을 고른 이유, 가격, 효능, 바르는 방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다. 얼마나 좋은 립밤인지 엄마도 알아주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사 온 립밤을 로션, 바디로션, 물티슈 등이 들어가 있는 종이 가방에 함께 넣었다.

 주 1회 면회가 가능했기에 이번주 토요일 외할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며 드리고 올 예정이었지만 토요일 새벽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외할아버지께 드리지 못한 '비판톨'이 한 동안 싱크대 첫 번째 서랍장에 놓여 있었다.

 엄마는 비판톨을 볼 때마다 바짝 말랐을 외할아버지의 입술을 생각하며 울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비판톨을 엄마도 나도 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입술이 터도 비판톨에는 왠지 손이 가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의 '립밤 방황'이 시작되었다. 

 립밤의 종류가 다양해져 골고루 써보는 재미도 있었다. 수가지 종류의 립밤을 테스트해 본 결과 '이 정도면 좋다.'싶은 제품도 생겼다. 

 그러던 지난주 친구들과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다 박장대소하는 순간, 아랫입술 한 중간이 찢어지며 피가 났다. 오랜만에 맛본 피맛은 비렸다.


 부모님을 처음 요양병원에 모시게 된 엄마는 초반에 립밤을 챙겨 드리지 않은 것을 한동안 자책했었다.

 휴대폰 화면 속 마구잡이로 피어난 입술의 각질들과 바짝 말라버린 외할아버지의 입술이 잊히지 않는다며 하루에 몇 번이나 생뚱맞게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우리 집 1층에 살고 계셨던 외할아버지는 같은 시간에 아침 산책을 나가셨다. 

 출근하려고 대문을 나서 골목을 걸어 나가다 보면  집 앞 작은 개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술을 들이부어 마신 전날 회식의 여파로 겨우 눈곱만 떼고 동네 근처에 사는 동료의 차를 타고 출근을 하려던 찰나 외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외할아버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저예요! OO이요!"

 "어디가?"

 "회사요."

 "어디 간다고?"

 "회사, 회사. 돈 벌러 가요."

 건강이 좋지 않아 기억력이 안 좋아진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아직 학생인가 보다. 회사 간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하시며 되물으셨다. 

 

 "이거 갖고 가."

 외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두장을 꺼내셨다. 동료의 차를 택시로 착각하신 듯 택시비하라며 건네 주시는 돈을 받지 않으려는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차 창문으로 돈을 던져 넣으셨다.

 "안 주셔도 돼요. 저도 돈 벌어요."

"받아. 할아비가 주고 싶어서 그래.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돌아가시기 전, 내가 본 제일 건강하셨던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이다.

 꼬깃한 두장의 만 원짜리를 만지작대다 결국 눈물나 버렸던 그날이 너무나 선명하다.

 외할아버지는 손자들 중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 주셨다.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것을.


 바짝 말라버린 외할아버지의 입술은 엄마의 잘못만이 아니다. 

 지 입술은 금이야 옥이야 온갖 정성을 다 하면서 정작 아픈 외할아버지의 입술은 걱정하지 않은 나의 잘못도 있다. 그래서 차마 비판톨을 쓸 수 없었다. 




 싱크대 첫 번째 서랍장을 열었는데 비판톨이 없다. 

 서랍 뒤로 넘어간 건가 싶어 장을 다 끌어내어 확인해 보아도 그 비판톨이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여기 있던 비판톨 어디 갔어? "

 "유통기한 한참 지났더라, 그래서 버렸어."

 "버려도 괜찮아?"

 "그럼 1년도 넘은 걸 어떻게 쓰니? 당연히 버려야지. 너 근데 입술 왜 그래? 립밤 얼른 발러, 입술 튼 거 보면 외할아버지 생각나니까."


 오늘 올리브영에 가서 비판톨을 샀다.

 재작년에도 1+1으로 구입했는데, 올해도 1+1으로 구입했다. 

 이제 외할아버지의 입술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외할아버지 생각에 엄마가 또다시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반질반질한 입술이 되기 위한 케어를 다시 시작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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