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남아있는 상처.
노트북 자판을 치다가 문득 왼쪽 손등에 남아있는 가로 5cm 길이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된 상처다. 그러니까... 고2 때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 짝꿍은 아주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1~2등, 전교 10등 안에 드는 친구였다.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농구에 미쳐있는 아이였는데, 야간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농구에 'ㄴ'도 모르는 나를 꼬셔 같이 농구경기를 보러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꽤 잘 맞았다. 그래서 같은 책상을 쓰는 한 학기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날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끔 문구용 커터칼로 손톱 정리를 하던 짝꿍은 어김없이 손톱을 정리하려고 필통에서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이 장난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 갑자기 짝꿍이 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 자꾸 그러면 이 칼로 손등 그어버린다?"
"그어봐 그어봐, 네가 할 수나 있을 거 같냐?"
"나 한다면 해. 정말 그어버릴 거야!"
짝꿍은 살짝 겁먹은 듯했지만 뱉은 말 때문인지 내 왼손 손등에 커터칼을 가져다 대었고, 순식간에 붉은 피가 실처럼 길게 늘어져 흘러나왔다.
나보다 더 놀란듯한 표정의 짝꿍과 당황한 나 사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짝꿍의 입에선 그녀 다운 멘트가 날아왔다.
"거봐! 내가 그어버린댔지! 네 잘못이야!"
표정과 말이 따로국밥이었다.
말은 세게 내뱉었지만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짝꿍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니 왠지 화를 낼 수 없었다.
원래 미안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 아이여서 사과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만,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사과를 받은 듯했다.
그렇게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휴지로 닦아내며 아무 일도 아닌 듯 그렇게 지나갔다.
그날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래 오래 남을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오늘은 문득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린 그날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 손등에서 피가 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는 왜 그 아이의 감정을 더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바보 같은 내 모습이 갑자기 한심하다.
치유와 힐링, 인간관계에 대한 책들을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글이 있다.
나부터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그래야 남들 도도 나라는 존재를 소중히 생각하며 대한다고.
책 읽은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실천은 이리도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다시 짝꿍을 만난다면 흉터를 들이밀며 그날 받지 못한 사과를 꼭 받을 것이다.
짝꿍이 감정 표현에 인색해 사과를 잘하지 못하는 유형이든 뭐든 생각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20년이나 지났는데 어디를 가면 걔를 만날 수 있으려나?
뒤늦은 객기가 나답게 느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