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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Feb 04. 2023

여담) 착한 미친놈입니다.

-할아버지께 볼펜 색깔을 알려드린 내 일화를 의심하는 남자친구.

 "어휴... 저 미친놈..."

 남자친구가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평소에 갖고 싶던 물건을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을 담아 어느 부족의 원주민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요상한 춤을 춰 댈 때

 5번 넘게 본 '미스터 선샤인'을 보며 똑같은 장면에서 똑같이 오열을 할 때

 밥 먹기 전엔 성질부렸다가 밥 먹은 후엔 무슨 일 있었나는 듯 흥얼거리며 신나 할 때

 절대 지지 않는 말빨로 본인을 쏘아붙일 때... 등등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그가 일관되게 내뱉는 말이다. 참고로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볼펜 상단에 한글로 색이름이 표기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글을 발행하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그로부터 카톡이 왔다.


 걔 : 너 오늘 발행한 글 좀 인위적이다? 누가 보면 개천사인줄?

 나 : 인위적이라고? 거짓하나 없이 있었던 일을 느낀 대로 쓴 건데?

 걔 : 할아버지한테 저렇게 친절하게 볼펜을 니가 골라줬다고?

 나 : 어!! 정말 물으시길래 내가 검은색 볼펜 정말 골라줬어! 정말로!!


 순간 억울함이 밀려왔다.

 내가 브런치에 발행하는 모든 글은 거짓이나 과장 없이 일어난 나의 소소한 일상을 기반으로 작성되고 있다. 물론 그 소소한 일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정이 누군가가 느끼기엔 좀 오바스러울 수 있긴 하지만, 나는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글을 쓰고 있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 : 할아버지가 대개 곤란하시다는 듯 검은색을 좀 골라줄 수 있냐고 나한테 정말 물었다고!

 걔 : 와... 그러면 정말 너 나쁜 거네...

 나 : 내가 왜 나빠?

 걔 : 나한테는 안 그러잖아. 남들한테만 착하고!


  휴... 이거였군...

 평소 자신을 대하는 나의 행실을 보면, 내가 절대 누군가에게 상냥하게 대했을 리 없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위'였다.


 나 : 내가 지금 젤 상냥하고 착하게 대해주고 있는 건 너거든?

 걔 : 뭔 소리, 처음 듣네.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 없는데?

 나 : 호강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 하네...

 걔 : 이봐이봐, 오빠가 얘기하는데 말하는 꼬락서니 봐... 어휴 미친놈...


 지금 내가 제일 위해주고 참아주며 착하게 대해주고 있는 건 남자친구인데 정작 본인은 그 걸 알지 못한다.

 이런 답답한 소리를 과하게 할 때면 내가 얼마나 당신을 위해주고 있는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기억력이 좋거나, 메모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내가 조목조목 나열하며 알려주면 그는 더 이상 군소리 하지 않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어휴... 미친놈... 한 마디를 안 지네..."

 "지고 이기고의 문제가 아닌데, 왜 내가 져야 해?"

 "넌 이래서 미친놈이라는 거야."

 "그래! 그럼 미친놈 하지 뭐!"


 우리의 대화는 늘 이렇게 끝이 난다.

 미친놈이라 해도 상관없다. 나는 미친놈이란 말이 싫지 않다. 뭔가 재주 있어 보이고 열정적인 느낌이다.

 무언가에 미칠 수 있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P.S 이대로 글을 끝마치려 했는데 안 되겠다. 이 글을 읽을 그에게 또 알려주어야겠다.


 저번에 영하의 날씨에 점심도 먹지 않고 자수 수업 끝나고 교보문고에서 책 구경 실컷 하다 슬램덩크 만화책 사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줬던 거 기억나지?

 그때 내가 찍어서 보내 준 슬램덩크 만화책 사진들 뒤늦게 보곤 '슬램덩크 챔프' 사다 달라고 해서 내가 집에 왔다가 다시 지하철 타고 교보문고까지 가서 만화책 사 온 거 기억나? 안 나?

 그날 엄청 추웠어! 니 유일한 취미가 만화책 보기니까 내가 주말에 실컷 보라고 사다 준 거야.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 인정할 거지?


남자친구에게 보낸 교보문고에 진열된 슬램덩크 만화책 사진(증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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