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런 줄 알았다.
나만 참기 힘든 줄 알았다.
적당한 직장을 다니고, 이뤄온 시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상, 투입한 시간에 대한 배반 없는 아웃풋에 대한 이의가 더 이상 없어졌을 때 나는 아주 점진적으로 표정의 생기를 잃어갔다.
그 상태를 자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반기를 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만 그렇게 예민하고, 나만 그렇게 만족을 모르고, 나만 그렇게 이상한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20대가 저물었고 30대가 찾아왔을 땐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말에 친구들이 모여 새벽같이 술기운을 빌어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하는 시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는 참 투명한 사람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애써 내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 하기를 꺼리는 이중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날도 친구들은 내 목구멍에서 자기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오래된 푸념과 불평의 예고와 같은 한숨소리에 슬슬 지겨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들이라면 오늘 하루 정도, 술기운을 빌어 몇 분 정도는 고질적인 우울증처럼 발현되는 나의 오래된 문제의식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눠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마디를 꺼냈다.
"나는 사실 이제 마비가 된 것 같아."
주말에 할 일 없이 누워 이미 봤던 영화와 드라마를 다시 뒤적이고, 알고리즘에 이끌려 하루의 몇 분, 심지어 몇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아가는 소위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스스로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그 시끄러운 적막과도 같은 시간들을 마치 노동의 참된 자양분쯤으로 생각했고, 한편으로 아주 유의미한 휴식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작은 화면에 눈과 귀를 고정한 채 식물 인간처럼 작은 방 한 켠에 누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나의 모습을 천장 위에서 무심히 감상하고 방치했다.
"너무 드라마틱하게, 예민하게, 유난스럽게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 자체가 나를 취약하게 만드는 거야"
그리고 머리 한 구석에서 반기를 드는 나를 잠재우며 스스로를 세뇌시켰고, 학대했다.
두서없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친구가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동감해서 할 말을 잃었어.
예전에는 죄의식이라도 느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들지 않아.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거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해. 내가 단순해졌다는 거에 만족감을 느낀달까?
예전에는 단순하게 살지 못해서 힘들었거든. 느끼는 것도, 고민이 되는 것도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거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었어. 무엇보다 지금의 삶이 온전히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니깐 그게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 한 편으로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나도 왜 자꾸 너처럼 그렇게 무감각해질수록 이 상황이 문제처럼 느껴질까...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 버려서 다시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왜 이렇게 돼버린 거야?"
나의 20대는 인생의 롤 모델을 찾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데 모든 시간을 써버렸다면, 지금의 나의 30대는 되고 싶은 사람도 많았던 그 시간들을 지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들의 잔상만이 신기루처럼 남아버린 것 같다.
꿈꿀 수 있었던 희망과 꿈이, 이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된 느낌.
다들 애써 티 내지 않지만, 갈 길을 잃은 30대에게 있어 인생은 20대보다 더욱 가혹했고 치열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조용한 경고를 애써 무시하고 넘겨버린다면
이 또한 다시 돌아오질 인생의 커다란 기회였음을 후에 깨닫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직감했는지 모른다.
그날의 술자리가 끝나고, 우리는 그날의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이후로도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인생은 오롯이 행동하는 자만의 것이라는 것, 자각은 단지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내가 보내오는 것일지도 모르는 이 경고를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이고, 부딪혀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도전을 해볼 예정이다. 지겨운 푸념과 불평 속 지독한 게으름과 무책임한 회피를 벗어던지고자 한다.
나의 30대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실체 있는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