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임신 초기, 임신 말기엔 단축근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쓸 생각이 없었으므로 쓰지 못했다기보다는, 쓰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스타트업 분위기의 회사에 막 입사한 차였다. 입사 3개월차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그땐 내가 하는 업무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시점이었다. 여느 중견기업 이상의 조직 안에서 맡은 바 주어진 임무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사업의 방향성에 방점을 찍고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 그 기획 역시 직접 아이데이션하고 실행해야했다. 직무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만난 이 회사에서의 일은 힘들긴 했지만 내가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일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다. 이런 상황에서 단축 근무를 하고 싶지 않았다. TF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 때문에 단축근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야근도 불사했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일과였는데, 하루는 상사 분이 나를 불러 말했다. "너는 괜찮다고 생각해도, 절대 네 에너지의 100%를 쓰지는 마. 80%만 써야 돼." 이 말이 내겐 약간 비타민 같았다. 어쩐지 내게 믿는 구석 한 곳을 조심스레 만들어 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특성상 직원들의 나이가 젊은 편이고,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겪은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나를 공감해 준건 상사 한명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동료들에게 임신을 해도 이렇게 일 열심히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그런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당신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거야, 라는 신뢰를 주고 싶었다거나.
사실 11-12주 차가 지나는 동안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하고 꽤 잘 먹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지독한 입덧에 시달리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루하루 급격히 말라갔다. 실제로 내 인생 몸무게 중 결혼 전 빡세게 관리하던 때를 제외하면 가장 저점을 찍은 시기였다. 구황작물과 샐러드류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육류를 먹지 못해, 남편이 갈비찜을 먹는 모습만 보고도 토기가 일 정도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변비가 시작됐고 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니 더더욱 음식을 먹지 못했다.
식품 관련 업무였기에 내가 소속해 있던 팀의 공간엔 푸드 스튜디오가 있었다. 매일 그곳에선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고, 임신 전엔 매일 달라지는 향기에 황홀했으나 임신 후엔 그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몇 번은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기도 했다. 출퇴근 시엔 만원 지하철, 버스에서 내려 구토를 했다. 점차 토를 하는 빈도가 늘면서 초췌해져 갔다. 그리고 이 시기엔 코로나19가 난리라 2차 백신을 맞지 못했던 나는 식당조차 출입할 수 없었다. 직원들끼리 삼삼오오 즐기는 점심시간에 나는 홀로 미팅룸에서 샐러드 같은 걸 먹었다.
나라에서 정해놓은 임산부 근로자에 대한 혜택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사용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단축근무를 쓰지 않는다. 나같은 경우는 내 욕심도 있어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상황에 도저히 단축근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업무를 대신해 해줄 사람도 없거니와 내가 단축근무를 쓴다면 결국 내 동료에게로 일이 쪼개져 업무 가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정부에서 법적 모성 보호 차원의 근로 기준을 만든다해도 현실에서는 사실상 적용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회사에서 빌런을 자처할 사람은 없다.
이렇게 '나 딴에는' 최선을 다해 일한 결과는 무엇으로 남았을까? 해피엔딩이었을까. 결과는 애매한 고과평가와 임신중독증 응급제왕 수술이었다. 내가 정부의 혜택을 받은건 개인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월 1회 임산부 정기 검진 휴가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그조차 내가 다른 직원들보다 더 누린 특혜라면 특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누적된 극심한 스트레스와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은 위태로웠다. 모든 임산부 검진 결과가 정상이 나왔지만 조금 이르게 출산휴가 신청을 하고 그 달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혈압 180, 당백뇨 증상, 신장은 기능을 잃어 오줌이 줄줄 새어나왔다. 5월생 아이를 낳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나는 그길로 이른둥이 아이를 강제 출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