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비야 데 레이바, 보살피고 보듬었다.
너, 네가 경찰인 줄 안다며?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주택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문구는 길고양이 번식과 발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주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공감하기는 어려운 문구이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를 무작정 두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돌봄에는 많은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웃과의 갈등도, 고양이의 안전도 모두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렇다고 해서 길고양이를 방치하고 학대하며, 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이를 배척하고 응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길고양이와의 공존 문제가 시민들의 주요 화젯거리가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소수의 사정으로 치부하던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등의 문제를, 결국은 모두가 함께 나서서 생각해야 할 사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고양이의 뛰어난 번식력을 길고양이 개체 수 증가의 원인으로 지적하기 이전에, 거리로 버려지는 고양이 문제를, 나아가 그렇게 유기된 고양이들이 학대받고 죽임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길고양이에 대한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TNR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른바 포획해서(Trap), 중성화하고(Neuter), 돌려보낸다(Return)는 프로그램으로, 기존의 포획 후 안락사 방법에 비해 안전하고 인도적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TNR 사업이 물론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보완되어야 할 지점도, 개선되어야 할 지점도 많다. 그러나 이는 길고양이와 시민 간 공존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첫 시도였다.
이제 막 공존에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사람과 고양이가 자연스레 어울리는 도시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나 영화가 익숙하지만은 않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만큼이나 이상적인 모습으로 거리의 개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동네의 삶은 놀라웠다.
식당 앞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틈으로 얌전히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산만 한 덩치로 참 순하게도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끔 가만히 앉아만 있길래 주인을 기다리거나 식당에서 키우는 개라고 추측했던 것 같다. 곧 닭고기를 그릇에 한데 모아 챙겨 나가는 주인과, 가게 담벼락에서 그것을 받아먹는 개들을 보며 그들의 관계가 우리 동네의 길고양이와 먹이를 챙기는 주민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보살핌에 좀 더 능숙했고 개들은 받는 것에 좀 더 익숙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면 다른 점이었다.
유독 우리의 시선을 끄는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지젤과 라우라에게서 들은 비야 데 레이바 광장의 아주 유명한 개였다. 자기가 경찰인 것처럼 군다는 이 아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묘사한 생김새 그대로 눈에 띄게 통통하게 오른 살집 때문이었다. 계단 위에 몸을 누이면 돌 위로 살이 접히는 게 귀여워 유심히 보게 되는 아이였다.
“진짜 웃겨,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옆에 와서 앞발로 나를 툭툭 친다니까.”
“맞아, 먹을 거 달라는 표시야. 아니면 애교 부리는 건가? 아무튼 너무 웃겨.”
“가끔 술 취해서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들 틈에 껴서 막 짖어. 자기가 경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광장 계단에 앉아 한창 떠들던 우리 곁에 다가온 아이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아 연신 “너가 걔구나!”를 외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태연하게 다가와 곁에 자리를 잡은 아이는, 쓰다듬음이 잦아질 때면 앞발을 척, 우리의 어깨나 허벅지 위에 올렸다. 다시 쓰다듬어 주면,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특유의 무료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 번만 더 쳐달라는 말에는 들은 체도 않다가, 시선을 피하면 다시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에 툭 앞발을 올리는 게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와 놀아주던 멍멍이는 왔던 때처럼 다시 유유히 자리를 떠나 다른 무리에게로 향했다. 광장의 많은 이들은 그의 행동이 익숙한 듯했다.
이들이 특별한 정책을 통해, 특별한 연대 구성을 통해, 특별한 규칙을 통해 거리의 개들과 함께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혹자에게는 그 방식이 거리의 개를 늘리는, 그래서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방치에 가까운 불편한 일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는 이의 시선에서 봤을 때, 비야 데 레이바에서의 공존은 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주고받음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다가오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들의 방문이 반갑지 않다면, 다른 곳으로 가기를 매섭지 않은 손길과 말투로 권한다.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놀이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체온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경찰서 앞도 식당 앞도, 혹은 누군가의 집 앞도 개들에게는 놀이터나 휴식처가 될 수 있었다. 간혹 싸움이 발생하면 저 집 개도 아닌데 모두 나서서 싸움을 중재했다.
그저 보살폈고 보듬었다. 모른 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