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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공동체와 음악 :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정서 만들기

2016.2.26


교회에 가면 늘 노래가 울려퍼지고, 무얼 하든 노래가 배경에든 맨 앞에든 반드시 놓이게 되는 것은 종파와 시대를 초월해서 기독교 전통 아니, 나아가 종교 전통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음악이나 노래를 그것 그대로 지칭하지 않고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ccm(현대의 상업적인 기독교 음악)을 '찬양'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허다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문장은 예배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관용어구가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찬양'사역자는 찬양을 반드시 음악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며 인상적인 '찬양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교회, 나아가 기독교 공동체가 음악이나 노래를 '찬양'이라고 칭한다는 사실은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드러내 줍니다. 일단 '일반 음악과 기독교 음악은 다르다'는 뜻을 내포하고, 그것이 다른 이유는 음악이 '찬양'으로서 주로 예배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요즘은 이를 '예배 음악'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 명칭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음악이 '찬양'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찬양의 음악으로서의 속성'이 알게 모르게 거세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며, 이 상황이 교회 공동체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지점입니다.



-1 예배 속의 음악 : 분석을 위한 틀


최근 발간된 피트 워드의 "우리가 예배하기까지" 라는 책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예배 음악 발전 과정과 그 의의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는 짤막하게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은사주의 진영의 예배를 평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전례가, 개신교에서는 설교가, 은사주의 진영에서는 찬양이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풀어 말하면 가톨릭에서는 전례 속에 설교(강론)와 찬양이 포함되어 전례의 전체적인 흐름을 끌어가는 요소가 되고, 개신교- 특히 한국 개신교 -에서는 미국의 대각성운동 시절의 천막 예배와 같이 목사의 설교가 중심이 되고 예배 순서(전례)와 찬양이 그것을 받쳐주는 구조이며, 은사주의 진영의 예배에서는 찬양을 통한 개개인의 종교적 경험이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현대 미국 개신교의 예배 형태에 깊게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는설교(말씀) 중심의 예배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와 동시에 1980년 말에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경배와 찬양 운동 - 이는 다분히 미국, 특히 영국의 예배 음악 중흥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 흐름에 영향을 받은 '찬양 예배' 흐름이 또 다른 주요 형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주의 노선에 깊게 잠겨있는 한국 개신교는 찬양을 말씀의 하위 개념, 돕는 도구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의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독교는 공동체를 통해 존재한다.'는 전제입니다. 이는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고, 많은 종교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공동체적인 요소를 뼈대로 해서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민족, 국가, 사회, 가족 등등...기독교는 독특하게도 초기에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것이 가족과 사회와 국가/민족 단위로 영역을 넓혀간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 교단/기구/조직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비추어 특징적인 현상이 등장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근현대에서였습니다. 바로 '공동체' 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지요. 개인에 대한 집중은 근대주의(모더니티)의 특징이고, 교회는 그것을 여러가지 이유와 측면에서 수용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혹은 비그리스도인 개인은 스스로의 경험/만남 등등을 통해 예배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바로 이 두 축,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어딘가에 속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예배를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요소는 정서다.' 라는 전제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부정하기 힘든 '공동체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개인들의 집합이자 개인적인 신앙 경험의 장소/시간 인 것 같은 예배도 알고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성을 형성하고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분석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는 키워드가 '정서'인 것입니다.


정서는 분위기, 흐름 등등의 단어로 보충설명할 수 있겠는데, 이성적 감성적 차원 모두를 포괄하고 그 너머의 역동성까지 고려하는, 지극히 주관적(미시적)이면서도 객관적(거시적)인 틀거리 모두를 사용하여 바라봐야하는 영역입니다. 앞서 제가 제시한 '전례, 설교, 찬양' 모두는 바로 이 '공동체의 정서'라는 기준점 하에 놓여 분석될 수 있습니다.



-2 예배 속의 음악


전례, 설교, 찬양 ..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를 대별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기준점으로 '공동체의 정서'를 제시했습니다.


공동체의 정서라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 월터 윙크 같은 신학자는 이를 '교회의 천사'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 나름의 흐름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른바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들은 이러한 '교회의 천사'를 파악하고 컨트롤 하는 기술이 뛰어난 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의 초점이 찬양(예배음악)이므로, 여기에서는 한국 개신교가 가진 공동체의 정서적 특징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가톨릭은 전례 중심, 개신교는 설교 중심, 은사주의 진영은 찬양 중심으로 나눠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설교와 찬양이 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영국이나 미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한국 개신교가 설교를 중심으로 찬양을 '도구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뒷받침되는데, 대표적인 레토릭이 "우리는 예배를 예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반드시 따라오는 비판이"예배에서 음악(찬양)이 전면에 부각될 경우 회중이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이 예배의 본질을 흐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여담으로 언급했던 부흥사들이야말로 설교라는 형태를 취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감정(정서)적 흐름을 매우 잘 조종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고, 신학교의 설교학 과정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다루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개신교는 이미 예배에 감정적인 측면이 깊게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예배 속에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의 영역, 설교와 찬양의 영역을 그리고 배치하는 로드맵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가 찬양, 나아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영향을 미칩니다.

흔히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고,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보면 꽤나 동등한 예배의 요소로서 음악이 대접받는 것 같지만, 한국 교회의 정서상 설교가 찬양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찬양이 설교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또 여담이지만 목사의 축도가 불가능한 경우 전도사가 주기도문을 함께 음송하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보다 목사의 축도가 더 권위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 집니다.


결국 찬양은 설교 아래에 놓여서 예배 전체를 보좌하고 돕는 역할에 한정됩니다. 이를 조금 더 분석하면, 이성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설교가 감성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찬양을 컨트롤하고 그 활동영역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도 가능합니다. 이는 과연 설교=이성적 / 찬양=감성적 이라는 도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최근 뇌과학, 심리학 등 많은 분야에서 연구하는 바로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행위는 굉장히 감성적인 영역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이성적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주된 작용이 뇌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신체적 반응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에서 찬양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견제하는 것은 이러한 음악의 특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설교보다 음악이 사람을 얼마나 더 잘 '움직일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찬양의 역할을 '설교를 돕는 도구' 수준에 묶어두려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논의의 방향을 전혀 새롭게 가져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논의틀에서는 더 이상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금씩 불거지고 있는 EDM 예배음악에 대한 논의에서도 기존의 이분법적인 접근, 그리고 그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예배 속의 음악 : 새로운 자리를 찾아서


예배의 변화를 위해서는 일단, 설교중심의 예배를 바꿔보겠다는 방향성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최근, 이른바 '대안' - 저는 이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 교회에서 이러한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얼마든지 '목사 자신의 신학/신앙관'이 들어있는 동시에 공동체 멤버들의 '정서'에 반응하여 만들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비정상적인 권위를 가져서는 안되고, 설교를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도 없다는 공감대가 계속 형성되어 가고 있기에 가능한 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교의 비중과 권위를 내려놓고 멤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정도의 방향성만으로는 '공동체의 정서'를 만드는 대안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해지는 것이 '전례'입니다.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전례로 넘어가는지 의아한 분들이 계실 수있는데, 이는 우리가 예배와 음악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전제와 관점을 수정하는 데서 오는 결론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열리지 않으면 음악을 복권시키려는 다른 어떤 시도도 무용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전에 언급했듯이 가톨릭을 비롯하여 성공회, 동방정교회 등에서는 전례를 예배의 중심에 놓고, 사실상 전례에 따라 설교와 찬양이 형성되는 구조입니다. 전례는 기독교 전체, 그리고 한 교단이 2000년 넘게 만들고 지켜온 전통이 녹아있기에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하고 안정적이며 기독교'성'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전례를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새로이 도입한다는 것은, 예배가 단순히 '개인의' 이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배를 통해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정서와 방향성'을 만드는 역할까지도 감당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어쩌다 뚝딱 생긴 것이 아니라 2000년역사를 흘러오는 가운데 그 중 어떤 영역을 구성하는 역사적이고 책임적이며 존재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위에서 그 공동체만의,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형성된 전통에 근거한 정서와 방향성을 만들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실제적인 견지에서, 설교중심적인 지금의 한국 개신교회가 음악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전례라는 다리 혹은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전례 중심으로 갈 필요도 없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예배가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정서와 방향성을 만들고 확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배론을 새로이 한다면 전례를 예배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도입하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전례 형식'은 첫 번째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국 대각성운동 시절의 천막예배 형태이기 때문에 그 흐름이 매우 단순하고 전통적 전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기에, 지금까지의 예배는 설교와 찬양이라는 두 가지 버팀목만 가지고 세워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체의 지형에서 볼 때, 예배는 언제나 설교와 찬양과 전례라는 세 요소로 지탱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모두를 회복할 때입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에서, 예배 음악 곧 찬양이 온전히 그 '음악적인' 성격을 되찾기 위해서는 설교와 전례 모두의 '권위적이지 않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결론을 미리 말한 셈이 되었는데, 다시 말해서 저는 찬양이 예배음악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음악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음악이 음악적이 되면 될수록 오히려 예배가 예배다워질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인식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예배음악이 충분히 음악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음악을 조심히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계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음악을 다루는 사람 나아가 예배 전체에 좋은 효과를 가져다 줄 리 없습니다. 음악을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이 음악적인 향상을 꾀할때마다 "이것이 나를 위함인가? 아니면 예배를 돕고 더 공교한 찬양을 하기 위함인가?"라는 고민과 자기검열을 해야만 합니다. 많은 예배음악 관련 서적에서는 이러한 자기검열을 권장하고 있지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오히려 음악적으로 향상될 때, 더 공교하고 예배에 '덕이 되는'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예배 전체를 놓고 살펴보았을 때에도, 예배 음악이 그 가사와 멜로디, 곡의 작법 안에 이미 설교 못지 않은 신학적/신앙적 흐름과 입장을 내재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그 음악성을 진지하게 다루고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 자리의 예배를 통해 공유하는 정서와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에, 예배음악을 음악으로서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흔히 우려하는 '음악이 예배를 넘어서는' 오류를 방지하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음악에 대한 저의 결론은, "예배가 예배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음악이 음악 되어야 한다."입니다.



-4 예배 속의 음악 : 음악 다운 음악으로 예배하기?


그렇다면 음악이 음악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음악을 예배 안에 가둬(!) 놓았던 개신교로서는 이 지점부터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주 가까운 곳에 이 고민을 도울 자료가 있습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한 권씩은 비치해놓고 있는 찬양인도자의 좋은 친구"많은 물**"라는 악보집이 그것인데, 챕터 사이사이에 소규모 공동체를 위한 음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제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제언이 전하는 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좋은 찬양을 선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정서에 맞는 곡을 '함께 만들어서 부르는' 작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럴 때 찬양이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이 음악 되게 하는 출발점을 여기에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음악이 존재해 왔기 때문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이루는 구성요소들 중 하나로서 음악이 기여하는 독특한 지점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예술적 표현도구 중에서 유독 음악이 사랑받아 온 것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와 예배 안에서 음악이 음악 되는 것은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과 직결되며, 음악이 음악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공동체의 정서와 흐름을 담은 노래를 만들고/채택하고 불러야 합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성공회 교단에 속한, 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형태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성공회 소속 교회에 다니지만 성공회로 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성공회 소속 답게 신부가 전례를 주관합니다. 하지만 기도문이나 예식의 흐름은 많은 부분 신부의 권위가 아니라 신자들의 참여를 요구하고, 그것에 따라 예배 전체의 정서와 흐름이 결정됩니다. 때문에 매주 예배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고, 상당히 민감한 느낌을 줍니다.


이 예배에는 전례와 설교(라기보다는 신자들이 성서정과에 따라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 뒤에 신부가 짧게 갈무리하는 형식입니다만), 그리고 음악이 모두 존재하는데, 이 음악이 독특합니다. 이 교회의 예배에서는 성공회가 전례에서 표준적으로 사용하는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만든 노래들을 주로 사용합니다.


전례에 고정된 예식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익숙해하고 좋아하는 - 정서상 부합하는 - 노래들로 고정해서 부르고 있고, 1~2곡 정도 (여는 노래, 봉헌하는 노래)는 매주 선곡이 바뀌는데 이 또한 공동체 멤버가 전례를 위해 혹은 공동체의 정서를 반영해서 만든 노래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여기에는 일종의 '함정'이 있는데,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세명이나 되고 그 중 두 명이 만든 노래가 주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모든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만든 노래'를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만, 창작이든 선곡이든 지향점이 '공동체의 정서를 반영한 노래'여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애초에 찬양인도자나 목사 한 두명이 '지정해 준' 노래가 아니고, 최종결정은 그렇더라도 최소한 공동체의 정서를 반영한 노래를 만들거나 선곡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전의 예배 음악과는 또 다른 성격의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음악이 음악 되는 것을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예배에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음악이 음악 된다는 것의 의미는, 음악을 전례나 설교와 함께 예배 속에서 공동체의 정서를 담당하는 중요한 - 이성적, 감성적인 - 요소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과연 그런 틀거리를 가진 공동체와 예배에서, 내 실력을 다해 연주하고 곡을 쓰고 노래하는 것이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고 경계해야 할 지점이 되어 개인과 공동체와 예배를 혼란스럽게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음악이 음악 될 때, 그런 혼란마저 전례와 설교를 통해 예배로 흡수하고 그러한 혼란을 느끼는 개인을 공동체 차원에서 감싸안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기독교 문화 속의 음악 : 세상 음악과 기독교 음악


세계적인 개신교 신학자 라이홀드 니버의 동생인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 제목이 기독교와 문화가 아닌 것이 흥미롭습니다. - 문화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를 대략 이렇게 정의합니다. 문화와 동떨어진 그리스도인 (근본주의), 문화를 정복하려는 그리스도인, 문화와 하나 되는 그리스도인. 물론 그가 정확히 이러한 워딩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근현대적 담론의 기본 좌표는 이렇게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 - 이를테면 드럼도 못 들여놓는 곳 빼고 - 에서는 문화를 정복하자는 주장을 강하게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거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어쨌든 문화와 하나된 채 어정쩡하게 살아가거나 둘 중 어딘가에 속해 있는 듯 합니다.


전자의 흐름이 이른바 CCM의 중흥기였던 90년대 중후반에 반짝였다면 후자의 흐름은 지금의 대세인 것 같습니다. 아니, 전자의 흐름은 기독교가 사회의 문화를 선도하던 6~70년대, 다시 말해 교회로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고 그들이 자연스레 문화예술을 통해 활동하던 시기에 태동되고 다져졌다고 보는 편이 옳겠습니다. 지금도 나이 지긋한 집사 권사 장로님들이 교회가 세상을 앞서가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 전반의 흐름은 "문화를 만든 시기 -> 문화를 선도하던 시기 ->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잠시 몸부림쳤던 시기 -> 주도권을 빼앗기고 정복당한 시기" 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4기, 즉 정복당한 시기로 볼 수 있겠고요. 이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문화와 담을 쌓고, 누군가는 문화를 향해 나아갔으며, 누군가는 문화와 하나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 3기, 그러니까 90년대 이후 이른바 세상문화가 교회문화를 확실하게 앞서나간 시기에 문화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어떤 지형으로 변해갔는지를 역사적으로 간추려보고 그 논쟁이 가지는 의미와 한계, 나아가 간단한 전망을 나눠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90년대 기독교 문화를 선도하던 중심에는 단연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연극, 글, 그림 등등이 '문학의 밤'을 중심으로 기독교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면, 세상 문화가 급격하게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에 남은 보루가 음악이 된 셈입니다. - 여기에는 지난 시간까지 나누었던,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서 음악이 존재한데 따른 탄탄한 기본 정서가 뒷받침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 이 시기 기독교 음악과 예배음악의 축은 각각 '주찬양'과 '경배와 찬양'이었습니다.


주찬양은 지금까지도 이름이 회자되는 김명식, 강명식, 김도현 등등을 배출한 CCM뮤지션의 산실이었고, 경배와 찬양은 하스데반 선교사를 중심으로외국곡을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고 말 그대로 '워십 열풍'을 예비하는 중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주찬양이 기독교 음악의 마지막 꽃을 피우면서, 그 규모가 어찌됐든 가요의 그것과 유사한 기독교 음악 '시장'이라는 것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는 90년대 중후반의 짧은 몇년 동안 비율적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입니다.


교회 곳곳에서 찬양 콘서트가 열리고, 유명 아티스트들이 탄생하고, 대형교회에서 이러한 '문화사역'에 여러 방식으로 개입/지원하기 시작하면서'판'이 커지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요 시장에 비하면 1/10도 안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지만요. 교회에 다니면서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최덕신, 송정미, 소리엘, 김명식, 강명식 등등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이 때였습니다.


기독교 문화로 세상 문화를 정복하자는 이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캐치프레이즈는 하덕규의 "음악은 오늘의 것으로, 메시지는 영원한 것으로"입니다. CCM이라는 단어의 뜻인 "동시대적 기독교 음악"이 의미하듯이, 세상문화를 정복하는 기독교 음악이 되려면 음악 퀄리티가 좋아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해야 하고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복음을 듣게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나중에도 평가하겠지만, 이렇게 음악의 형식과 내용을 애써 분리시키려는 태도가 오히려 기독교 문화의 쇠락을 초래하는 내부요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6 기독교 문화 속의 음악 : 기독교 음악이란 가능한가?


음악적 형식과 메시지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퀄리티 있는 장르 형식에 '본질적인' 복음을 담으려는 시도는 6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이미 시작되어 한 차례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히피들이 이러한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여 하위 문화 주체가 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러한 원동력이 제공되었기에 꽤 오랫동안 기독교 음악이 형식과 내용의 분리라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미권과 한국의 상황은 달랐고 그것이 아주 빠른 기독교 문화 정확히 말해서 기독교 음악 시장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미권과 한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 음악을 소비하고 재창조하게 만들 수 있는'교회 내 수요자들'의 존재 여부였고, 한국은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교회 차원에서 시도된 다양한 '문화 사역'은 먼저 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없어 자연스럽게 무너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음악 시장이 '예배 음악 시장'으로 재편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경제적 생존을 보장하는 기독교 내 컨텐츠로의 자연스러운 쏠림현상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경배와 찬양, 기독교 음악의 짧은 중흥기가 지나간 뒤에 한국 개신교에 남은 것은 각 교회의 드럼과 기타와 신디사이저와 베이스, 그리고 찬양악보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 음악은 교회가 망하지 않는 한 끊임없는 수요를 창출합니다. 영미권 기독교 음악 시장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상당부분 예배 음악 분야로 치우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문화 전반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데 실패했음을, 아니 그러한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연, 기독교가 문화를 대하는 태도 중에서 어떤 것이 의미있는 것일까? 문화와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해내는, 그래서 피아노(...)반주에 찬송가(...)만 부르는 것으로 자신들의 문화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주의적 태도? 아니면 세상 문화를 정복하기 위해 형식과 내용의 분리 및 재창조를 꾀하며 그리스도의 문화적 군병이 되어 달려나가는 정복적 태도? 아니면 그런 것은 모두 소용 없고 세상 문화는 그것대로 교회 문화는 그것대로 즐기려는 태도?


저는 이제 우리의 사고틀을 규정하는 이러한 도식 자체를 재검토하고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라는 것, 나아가 세속과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그 관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 전반에 대해서 사고틀을 재구성하는 것은 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여기에서는 음악 영역에 관련지어 진단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합니다.


세속과 종교, 기독교와 '세상' 문화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중요한 통찰이고, 발전시켜야 할 상황 인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의 우리의 논의 전제는 '기독교 문화는 세상 문화 안에 속해서 숨쉬고 살아간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를 세상 문화로 '대체'한다는 발상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는 불가능해집니다. 그 양이나 질, 다양성의 측면에서 기독교 문화는 결코 세상 문화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좀 더 겸손하게, '세상 문화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차원으로 스스로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지금껏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선에서 분투하는 '사역자'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오염시키지 않고' 세상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습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는 자세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자세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7 기독교 문화 속의 음악 : '착한 노래'를 넘어서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자전적인 스토리를 노래로 정리해서 양화대교라는 매개체로 풀어내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오랫동안 기독교 문화 영역에서 활동한 한 사역자가 "마포대교"라는 노래를 내놓았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도 잘 견뎌왔어 /누구도 너의 마음 /그 깊은 고독을/알아주지 못해도 /누구나 걸어가지만 /누구도 쉽진 않은 삶 /이 악문 이 시간이/ 공허하게 느껴지겠지만 /어쩌다 마음이 넘쳐서 /비를 맞은 듯 온 몸이 젖어도/넌 잘할 거야 또 이겨낼거야/ 여태 그래온 것처럼 /여기가 다 끝인것처럼 /잠시 이 곳에 머리를 뉘어도 /다시 일어나 또 이겨낼거야 / 여태 그래온 것처럼"


마포대교를 지날 때 점등되는 글귀를 보고 지은 노래라고 합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고, 나아가서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가사를 보고'오글거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간의 기독교 음악, 소위 '착한 노래'를 표방한 부류와 별다를 것이 없는 정서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와 양화대교 ('마포대교'가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굳이 착한 정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양화대교가 그러한 반면, 마포대교는 아주 직설적으로 위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양화대교가 은유를 십분 활용하는 반면, 마포대교는 아주 직설적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기독교 문화 전반이 가지는 일종의 강박을 봅니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데 있어서 벌어지는 논쟁 중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뺄것이냐 넣을 것이냐 입니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 형식이 세련되어도 '불신자'들이 듣지 않는다는 의견과, 그럼에도 기독교 음악의 본질은 예수를 전하는 데 있다는 의견이 부딪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타겟으로 삼으려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양화대교와 마포대교의 차이처럼, 같은 '위로'의 정서라도 그것을 전달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화 컨텐츠로서의 퀄리티가 결정됩니다.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착한 노래'를 표방하는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언제든 꽂아넣을 비수처럼 숨기고 있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정복적 관점' 그 자체가 문제고, 이 문제는 기독교 음악 뿐 아니라 문화, 나아가 신학과 공동체 전체를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양산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역시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기독교 문화(음악)의 내용을 만드는 뼈대인데, 지금 한국 개신교 전반에서'믿고 있는 신학'은 개혁주의와 경건주의, 오순절 주의가 체계화되지 못하고 뒤섞여 있는 형태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내용이 유연함을 잃고 경직되기 쉬우며, 예수라는 중요한 '컨텐츠'를 교리의 경직성에 가두거나 반대로 아주 추상적으로 미화해서 그 예술적 가능성을 거세해버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예술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이들조차 '교회에서 안되는 표현은 기독교 음악에서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결국 우리는 어쩌면 "기독교 음악"이라는 네이밍과 그러한 정체성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동체와 신학이 함께 변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문화도 변화를 추동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부적인 모순과 갈등을 축적하느니 차라리 과감하게 짐을 내려놓고 기독교인으로서 예술을 한다는 최소한의 가이드 라인을 가지고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인디 음악계'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 기독교에 오래, 깊이 몸담았던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종교를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듣다보면 기독교인 인디 뮤지션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장르적, 정서적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나름의 한국 개신교적 음악 장르 혹은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음악이라는 네이밍을 내려놓아도 기독교적 음악인으로서 살아갈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음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마무리 짓는 이 시점에서 제가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안 드리자면, 그것은 "내려놓음"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내려놓고,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라는 강압적인(?!) 정서를 내려놓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려놓고, 기독교 문화는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려놓고, 세상 문화는 모두 악하다는 주장을 내려놓고, 내가 생각하는 예수와 하나님과 예배와 음악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내려놓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있는 바에야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종교적 열심을 다하여 인생을 바치고 있음에도 뭔가 계속 잘못되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탓이기보다 인식과 방향 설정이 가져온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부디 이 글들이, 당신에게 진정으로 내려놓을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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