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이 공사하는 소리로 시끄럽다 했더니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다. 세금이 낭비되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 코를 막는다.
- 은행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유는 흙이 아닌 아스팔트에 떨어져서란다. 인간은 늘 지가 잘못해놓고 남탓을 하고 남을 죽인다. 지삐 모르는 것들.
- 집 아주 가까운 곳에 보호수가 있다. 지나가면서 흘낏 볼때마다 그 위엄과 품격이 느껴질 정도다.
- 전주의 우범기 시장은 기존 시장이 두 명이나 범죄로 날아간 덕에 시장이 된 주제에, 버드나무를 학살하는 우를 범했다.
- 나무는 인간 없이 (더 잘) 살 수 있지만, 인간은 나무 없이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자르고 죽인다. 철없는 것들.
어릴적에 표류기를 좋아했다. 한강의 수원지로부터 서울의 한강을 지나 인천을 거쳐 강화도까지 혼자 뗏목을 타고 여행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자주 상상하곤 했다. 그래선지 CBS 라디오의 "이강민의 잡지사"에서 문순득의 표류기를 다뤘을 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놀라운 표류기에 마음을 뺏겨 이를 다룬 책까지 읽기에 이르렀다.
문순득은 19세기 초, 한반도 최서남단에 위치한 우이도(오이도가 아니다.)에서 해상무역을 하는 유지 가문, 문씨 가문의 일원으로 뛰어난 관찰력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상인이었다. 강이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문순득의 가문이 운용하던 선박은 현대인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작은 어선 수준이 아니라 각종 해산물과 곡물을 활발하게 거래하는 꽤 규모를 갖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순득과 그 일행은 당시 흑산도 지역 특산품이었던 홍어와 육지의 곡식을 실은 선박으로 항해중이었는데,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아예 적극적으로 방향을 틀어 최대한 빠르게 육지에 닿기 위해 항해를 계속한다. 그렇게 그들은 류큐 (오늘날의 오키나와) 왕국에 닿게 된다.
이후 스페인 식민지였던 여송(오늘날의 필리핀, 문순득이 간 곳은 루손 지역)과 푸르투갈의 식민지 오문(오늘날의 마카오)을 거쳐 중국을 횡단하여 북경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각 지역마다 몇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머무르며 각 국가의 풍속과 선박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며 기록했다.
연구에 따르면 그는 해양상인답게 다른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류큐 왕국에 머물며 풍속을 관찰한 기록에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손으로 먹는 모습을 기록한 뒤 "젓가락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인 듯 하다."는 자신의 의견을 부기해놓았다. 다른 시대의 조선 관리가 같은 풍속을 두고 미개하다고 기록한 바와 대조된다.
특이한 점은 류큐를 비롯해 청나라, 여송, 오문 모두 문순득 일행과 같은 표류자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있었고 이것이 일정 정도 잘 작동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류큐에 9개월 가량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류큐 당국으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인도적인 차원도 있었겠지만, 혹여나 있을 국제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후 문순득 일행은 청나라의 선박으로 조선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서게 되는데, 이 또한 표류인(난민)에 대한 인도절차가 각국 사이에서 연계되어 작동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배가 풍랑을 만나, 문순득 일행은 의도치 않게 여송에 표착하게 된다. 두 번째 표착이다. 여기에서 문순득과 김문옥 두 명만 여송에 남고, 다른 일행은 다른 중국 선박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문순득은 여기에서 생존을 위해 짚을 꼬아 장사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여송(필리핀)어 단어장을 만든다. 이후 이 단어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문(마카오)에 도착한 문순득은 류큐나 여송에서처럼 각 지역의 습속과 선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이 역사 속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천주교 박해로 인해 우이도로 귀양살이를 왔던 실학자 정약전을 만나 체계를 잡고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남겼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인 이강회가 이를 필사하여 보존했기 때문이다.
문순득이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뒤 몇년이 지나, 제주도에 표류한 여송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고보니 그들은 표류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며, 문순득이 만들어놓았던 단어장을 통해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자 기쁨에 몸부림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당시 조선이라는 국가가 해양무역과 네트워크에 얼마나 무관심하고 폐쇄적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다른 국가가 표류인에 대한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며 국제관계를 고려해 국비로 이를 지원한 것과 대비된다.
어릴적 구구단처럼 외웠던 한반도의 지리적 요건은 "삼면이 바다, 사계절이 뚜렷하다"였다. 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계절변화에 비해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해안에 살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좀처럼 절감하기 힘들다. 섬과 다름없는 한반도는 바다로 막혀있기도 하지만 바다를 활용한다면 얼마든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좋은 배를 만들어 파는 데 머물 뿐,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미등록 이주민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정서에 갇혀있음에도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에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기회로 삼지 못하고 한계로 단정지어버린 우리의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