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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과위생사 이주화 Dec 08. 2022

#2 우연에서 멈출 것인가? (5)

두드리다 보면 열리긴 열리더라

일본에서 유학 비자로 근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급이 비교적 높은 야간에 근무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벌 수 있는 돈은 우리나라 돈으로 80만 원 정도였다. 

여기에 자취방 월세가 45만 원. 전기, 수도, 가스, 인터넷이 각각 5만 원씩 나왔다. 매달 고정 지출액이 65만 원, 여기에 아무리 알뜰살뜰 장을 본다고 하더라도 식재료나 샴푸, 휴지 등을 사면 일주일에 4-5만 원 정도는 쓸 수밖에 없었다. (저렴한 샴푸를 구입해 사용하다 보니 항상 머릿결이 뻣뻣하고 윤기가 없었다.) 그럼 벌써 매달 -5만 원인 셈이었다.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대학 내 유학생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국제부에서 다양한 장학금 프로그램을 소개해줬고 그중 나는 JASSO(일본학생지원기구)에서 매달 약 48만 원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월세를 내고도 3만 원 정도가 남았으니, 약 40만 원 정도의 여윳돈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남는 것은 없었다. 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들, 미국인 친구, 브라질 친구, 인도네시아 친구, 또 나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한 후배와의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외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면 빠듯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겸하며 일본 대학원생으로서의 1년을 무사히 마무리하는 듯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전 장학금만큼만 주세요. 살아야 해요.

안 그래도 빠듯한데 동아줄 같았던 JASSO 장학금은 1년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슬슬 동아줄이 끊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학금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학금은 다른 장학 기관과 동시에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받을 수 있을만한 장학금 프로그램을 선별해야만 했다. 그 당시 금액대는 40에서 100만 원 정도로 다양한 장학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나는 '딱 50만 원 정도만 받게 해 주세요. 더 욕심내지 않을게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금액대의 장학 프로그램에만 지원을 했다. 그런데 점점 동아줄은 끊어져가는데 희한하게 어떤 장학 프로그램에서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돈 때문에 유학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별다른 방도가 없어 유흥업소에서 일해야 하나 싶은 최악의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 사람들의 유흥거리가 되기 위해 부모님께서 나의 유학을 지원해주신 건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에 도박을 거는 듯한 마음으로 월 100만 원 정도를 지원해주는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다.

선발 결과가 좀 빨리 나오면 마음을 놓고 생활을 하거나, 빨리 다른 장학 프로그램을 찾아볼 텐데, 하필이면 기존 장학금이 끝날 때쯤 결과가 나왔다. 그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 간절한 마음을 놓칠 수 없었다.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 나의 일본 유학생활의 본 의미는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나는 돈을 벌거나 일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어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고, 모든 강의를 듣고 아르바이트까지 다녀온 새벽 1~2시부터는 오늘 들은 강의를 번역해야 했다. 그렇게 나의 밤낮은 바뀌었지만 우스갯소리로 히로시마와 한국은 시차가 8시간 정도 난다고 이야기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대학 때까지도 받아보지 못한 All A+ 받고, 장학금 더블까지 진행시켜...
All A+, 엄밀히 말하면 All S의 성적표


배움에 있어서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타지에서 고생했다는 위로와 응원 같았다. 게다가 월 100만 원씩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뭘 잘해서 받았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내가 바라던 것보다 더 큰돈을 받게 되어 좋았다.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안심하려던 것도 잠시, 나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우선, 원래 하던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의 여파가 나에게도 미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지침에 따라 내가 일을 하던 한식당은 물론 모든 식당들은 영업시간을 단축해야 했고, 주로 저녁에 술과 한식을 팔던 내 일터는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아르바이트생들을 모두 자르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장학금이 있으니까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이전 수준만큼 생활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코로나가 점점 심해지는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게 되고, 당시 일본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이런 점을 걱정하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했는데, 나로서는 약간 나만 유난 떠는 듯했고 나 혼자 살겠다고 하는 것 같아 그만두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지침 덕에 나는 오히려 한식당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맘 편히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원 강의도 전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다행인지, 나는 모든 학점을 1학년 때 취득해 졸업논문만 작성하면 됐다. 되도록 대학 출입을 삼가 달라는 학내 지침에 따라 나는 집순이 그 자체가 되었다. 대학원생이지만 프리랜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진짜 어려움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전 남자 친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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