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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Oct 04. 2019

우리는 늘 올려다보며 살아왔다

정말이지, 가을을 내팽개치고 싶다.

가을이 시작되면, 좋은 것이 하나 있다. 하늘이 높고, 파랗다.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여유라는 것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없는 시간 틈에서도 돋아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을은 좋은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이 조금 더 많다. 열거하면 이 글이 지저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우울과 고독 무기력일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도록 한다. 가을이야말로 내게 유일한 성찰의 시간이자, 다른 차원의 기분을 만들어낼 마법의 시간이다.


가을만 되면, 나는 괜히 센치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노랫말에 유독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 때가 가을이다. 떨어지는 잎새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옷깃을 여미고, 몸이 움츠러들고, 무기력해지고, 금방 피로해지는 때가 지금 내가 관통하고 있는 가을이라는 것의 짓궂음이다. 가을은 어둑어둑한 시간에 내리는 비와 같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가을은 당신의 마음 깊숙이, 옹골진 곳에 박혀있는 우물과도 같다. 그 우물엔 검게 묽든 물이 출렁거리며, 넘칠 것 같으면서도 아슬하게 넘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을엔 고민이 많아진다. 생에 대해, 인생에 대해, 부모에 대해, 미래에 대해. 수많은 걱정과 고뇌를 가득 끌어안게 된다. 즉,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가득 싸매고 정처 없이 길을 걷는 짐꾼과도 같은 숙명이다. 가을이란 다른 계절처럼 조용히 오는 법이 없다. 불쑥 내 집을 쳐들어오는 불청객처럼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그러나 나는 이번 가을을 조금 다르게 이용해 먹고자 한다. 가을을 패대 기치는 것이다. 내가 걷고 있는 내 아래의 모든 땅을 가을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내가 뱉어내는 생각과 고뇌가 모두 가을이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고, 신뢰해 보기로 한다.


최근 걷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걷기 시작한 이유는 다이어트다. 최근 1년 사이 체중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허탈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보단, 이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진즉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 생각을 아무런 표정 없이 엎드린 상태에서 넷플릭스를 보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강력하게 내가 변화하길 바란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변화를 해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나의 인생이 변화하길 바라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으면 하는 두 가지의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살다 보면 문득, 지금의 내 삶에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러나 회의감은 회의감일 뿐, 그 어떤 의미도 없다. 그저 지나갈 뿐이다. 사람의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간곡히 변화된 삶을 갈구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가을을 오해한다.

걷는 매력을 알게 된 이유는 "가을의 좋음"에 있다. 우습게도 가을의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은 "가을의 유일한 좋음". 딱 한 가지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다. 가을 하늘은 미세먼지도 적고, 무엇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담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과 스마트폰의 고해상 화질로 하늘을 열심히 찍는다. 나는 걷기 시작하면, 적어도 두세 개의 하늘 사진을 찍는다. 해가 지기 전과 해가 질 때쯤, 해가 진 직후다. 그 찰나의 변화는 장관이다. 하늘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아름답기도 하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가을 하늘 사진을 찍다 보면, 나도 모르게 변화라는 것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하늘은, 변화라는 단어의 몸통이 아닐까. 더 이상 가을은 불청객이 아닌, 불청객으로 가장한 나의 유일한 나다.


그러니까, 우린 늘 올려다보는 사람이다. 최대한 멀리 그리고 높이.

걷는 것이 숙명이 아닌, 올려다보며 건재한 두 발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가장 완벽하고, 치열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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