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건》다니카와 슌타로 시, 오카모토 요시로 그림, 권남희 옮김, 비룡소(2020)
2020년 12월 초 쌀쌀한 주말, 소개팅남과 안국역 주변 길 위에서 만났다. 그가 첫인사와 동시에 건네준 것은 미리 뜯어 데워 놓은 핫팩. 우리는 크림 파스타를 먹고 북촌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당시 코로나로 실내 카페를 이용하기 어려웠는데, 겨우 찾은 고즈넉한 곳에서 해 질 무렵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역에서 꽤 멀어졌기에 그는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택시를 불러놓았다. 함께 택시를 탔고 지하철 열차 안에서 헤어질 때 다음엔 영화나 공연을 보자고 약속했다.
그 후로 3주 정도 나는 강화도 부모님 댁에, 그는 원주 회사 숙소에서 우리는 저녁이면 한 시간씩 전화통화를 했다. 어느 날은 벽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핸드폰이 뜨거워져 귀를 대기 힘든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 코로나가 우리 몸은 떼어놓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밀착되게 만들었다.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매일 목소리를 들었고 그의 유머 감각에 나는 빵빵 터졌다. 두 번째 만남은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내한공연을 본 뒤 레스토랑에서 설레는 저녁을 보냈다. 하하 호호 웃다가 대뜸 그가 물었다.
“우리... 언제를 1일로 할까요? 오늘, 아니면 처음 만난 날?”
약속이나 한 듯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다. 내가 그에게 건넨 그림책 《살아 있다는 건》 앞장에는 김종삼 시인의 ‘어부’ 마지막 부분을 써주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우리는 소개팅했던 날을 1일로 정했고, 《살아 있다는 건》은 지금 신혼집 책장에 놓여있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살다’라는 시는, 길바닥에 죽어있는 매미 그림 위에서 시작된다. 여름날의 놀이터, 할아버지 댁, 마을 상점들이 모여있는 거리, 주인공인 아이들의 가정집 등 우리네 일상이 담긴 사진 여러 장을 넘겨 보는 느낌이다. 그림책에서 내가 많이 울었던 페이지는 할아버지가 손주들의 집으로 떠나기 전 현관에 홀로 서 있는 뒷모습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는 남편을 만나기 전이었지만, 나중에 선물할 책으로 고르면서 이 장면과 그의 삶이 겹쳐 보였다.
그는 입이 짧아 마른 편이며, 워커홀릭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는 동안 위염을 달고 살았다. 8남매 중 막내인 남편은 40대 초중반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떠나보냈다. 주변 지인 대부분은 가정을 꾸렸기에 늘 혼자서 시간을 보낸 그가 안쓰러웠다.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슬픔과 외로움을 안아주고 싶다. 50년간 애쓰며 살아온 남편의 시간이 앞으로 기적이 될 거라고, 그렇게 둘이 함께 잘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어쩌면 《살아 있다는 건》이 나의 이른 프러포즈였지 싶다.
나는 그를 만나기 3년 전에 오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고, ‘라이프 코칭’을 접하면서 삶의 유한함을 계속 맞닥뜨렸다. <있는 것은 아름답다> 사진전,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연극 <메멘토 모리>, 밑줄 그으며 읽은 책 <인생 수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국악 공연 <꼭두>, 깊게 만났던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 등에서 죽음을 다양하게 묵상해 왔다. 죽음이 있기에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혼자 걸었던 인생길에 나와는 결이 다른 그 사람이 나란히 걸어주기 시작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인내하고 양보해야 할지 모른다. 조금 늦게 만난 만큼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몇 주년까지일지, 삶이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살아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며 사는 동안 많은 기쁨이 있었다며, 노년이 된 우리 부부가 《살아 있다는 건》을 펼쳐 볼 어느 날을 상상해 본다.
* 원주시그림책센터 일상예술 프로그램 중 '그림책 에세이스트 양성과정' 에서 발행한 <그림책, 나의 이야기>(2023)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