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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Feb 17. 2023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外

머저리 같이 발버둥만 치는


고전 명작 <병신과 머저리>는 시대적 상처를 입은 ‘병신’과 상처는 없지만 그 후유증에서 회복 의지를 잃은 ‘머저리’의 이야기다. 지금의 상황을 빗대자면 스스로 추락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머저리’에 가깝다. 나름의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머저리가 맞다. 그러고는 병신이라고 스스로를 되뇌고 있다.


아, 정말 긋기만 해도 떠나가는 인연에 신물이 났는데. 놓는 척만 해도 놓아지는 모든 관계에 질릴 대로 질렸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그 자체가 머저리 같다. 학습 효과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겸허히 상처를 받는다. 남 탓은 힘드니 내 탓을 하자, 그러면서 죽을 것처럼 하루를 간신히 넘기면 약 하나에 목매달던 과거와 비교하며 ‘그래도 지금이 더 낫다’라고 자위한다. 일종의 성취감 달성이다.


이 발버둥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이미 어떤 ‘껀덕지’도, 자격도 없어서 그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어 할 수가 없다. 그 사람 근처에서 표류라도 할 수 있다면 만족할 텐데, 이미 난파된 관계의 결말은 비극으로 예정되어 있다. 인생의 여러 막이 드라마틱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2023년의 첫 장은 비극이었다. 나는 잘 웃으며, 무대 뒤에서는 우는 역할을 맡았다.


얼마 전에 운이 좋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바라는 결말에 도달할 확률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머저리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머저리로 남으려고 한다. 더 이상 자위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보고 싶으니.

친한 친구도 더 이상은 아닌


나는 '친한 친구'였다. 그깟 인스타그램 연두색 테두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그 촌스러운 색깔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 이상 우리의 관계는 연두색이 아니다. 나의 ‘친한 친구’들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SNS가 활발한 사람이 아니다. 내 치부는 너무 많았기에 그런 것을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내 감정을 표출하며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인스타그램을 심심할 때마다 열어보고, 당신의 스토리라도 올라왔다 싶으면 기쁜 마음에 버선발로 마중이 나간다. 초 단위의 시간대가 보이면 죄책감이 든다. 내가 스토킹이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이 느낄까 봐 또 한 번 강렬하게 죽고 싶어 진다. 이전에 가깝다고 생각할 땐, 이 초 단위를 축복이라 여겨졌다. 당신과 내가 통하는 것 같다는 망상을 곱씹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 축복이 저주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나 없이도 이렇게 행복할 텐데, 나 혼자 늪에 빠지는 거 같아서.


당신이 올리는 스토리에 하나하나 마음이 찢어진다. 나는 이제 숫자 1이 지워진,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린 친한 사람이 아닌 거 잘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내 하루를 좀먹는다. 하루하루 내가 올리는 스토리만큼 나는 외롭고 죽고 싶으며, 당신은 내가 이런 걸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알 일도 없겠지만, 나는 이걸 동정 삼으려고 쓰는 게 아니니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 나는 동정으로 당신의 관심이나 사랑을 얻고 싶지 않다. 당당하게 사랑받고 싶었기에 이렇게 후회할 짓을 했고, 다분히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픈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생각이 많다. 당신이 던진 모든 말들을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평범하게 후회한다. 이런 대답이었으면 우리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에 벗어나지 못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당신이 나에게 던진 질문 하나하나를 이상하게 흘리거나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 옆에 있지 않았을까. 사실 이제는 그 '옆'이 연인이 아닌 '친한 친구'여도 행복했을 거 같다. 나는 당신을 잃은 거 같아서 죽고 싶은 거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없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기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대개의 경우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것이 나 없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어느 순간 그것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 없이 상대가 살 수 없기를 바라는 종류의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닮고 싶어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사랑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허지웅의 '그게 사랑이었어'는 내가 항상 반복하는 사랑(혹은 실수)과 같았다. 이러지 않았던 경우는 정말 몇 번 없는데, 그랬던 과거의 인연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나는 '명치에 니킥을 맞은 것처럼' 빠지지 않으면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 편이다. 편안한 사랑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강렬한 끌림이 없다면 내 일상을 제쳐두는 편이 아니기에 쉽사리 사랑에 빠지지 않기도 하다. 그랬던 내가, 지금 반년 가까이 지랄 맞은 일상을 향유하고 있다.


놀랍게도 최근의 글은 모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무관심한 만큼,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사실 존경에 대한 의미로 시작한 호감인데, 그렇다 보니 나는 그 사람 옆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을 얻고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그 사람을 더 오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막연하게 도전하고 싶었다.


이런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은 무참히 추락했다. 추락하는 것에는 항상 날개가 있다.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부끄러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다리라도 분질러졌는지, 더 이상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짝사랑 그 이상으로 빠진 죄로 병신 혹은 머저리가 됐다. 적어도 그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진 않을 텐데.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 추락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 사람의 연락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그 사람이 내게 원하는 포지션인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재다능한 나는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고 열심히 어필해 봤지만, 결국에는 쓸모없는 잉여인간이었을 뿐이다. 불필요한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효율적인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 고작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을 생각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면서도 세상 슬프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나는 진심으로 당신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서 여럿 발버둥을 쳤다.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지만, 소리 없는 메아리에 그쳤겠지. 적어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나 없이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내가 없어야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지금의 위치에 조금 만족한다.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오는 꿈은 무척이나 소중하다. 당신을 본 순간부터 꿈인 것을 자각한다. 그때도 가장 행복하면서도 제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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