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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난돌 Jan 11. 2019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 (1)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베트남의 시각

  호치민 시내 관광의 중심에는 통일궁이 있다. 그리고 통일궁으로부터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이 있다. 평소 여행을 할 때는 현지 길거리 모습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지 않겠다 싶으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제쳐두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호치민에서의 3일 동안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박물관이었다. 베트남의 박물관들은, 관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로 오전 8시에 열어 오후 5시 사이에 닫고,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는 점심시간으로 잠시 휴관한다. 그렇기에 빠르고 천천히, 달리 말해 꼼꼼히 보되 두 번의 낮 사이에 최대한 많은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도록 경로를 짜야했다. 호치민에서 3일을 보냈지만 왜 두 번의 낮이냐 하면 도착한 날에는 공항에서 잡히고 쎄옴기사와 싸우는 둥 이런저런 소동으로 두 시를 훌쩍 넘겨서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곤 박물관으로 착각했던 은행


  첫째 날,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해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였다. 입장료는 40,000동으로 약 2,000원이다. 매표소에서 박물관 입구까지는 약 70m 정도로, 그 사이에 공군 전투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잰걸음으로 걸으면 한 달음이지만 우기인 8월답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매표소 바로 뒤에서는 직원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입장 스티커를 확인한 뒤 우산을 빌려주고 있었다.

전쟁 증적 박물관 입구


  전쟁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면 가운데에 소책자가 진열되어 있다. 이를 참고하면 박물관 전시를 보는 데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층으로 먼저 올라가 번호가 매겨진 순서대로 관람하며 내려오면 된다. 3층에는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 개요를 기증받은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당시 사용되었던 총과 포들도 볼 수 있다. 2층은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이 받은 피해를 총상 등의 물리적인 피해와 고엽제와 같은 화학적 피해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층에서는 전쟁 이후 베트남이 어떻게 나라를 재건했는지를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와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과 함께 담아내고 있다.



  3층 전시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미국’ 독립선언문의 일부이다. 미국에 대항한 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에서 미국의 근간이 되는 선언문을 인용한 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다음과 같은 천부인권을 부여받았다. 바로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라는 출처만 손바닥으로 살짝 가리면 오늘날 어디에 내놔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들이다. 나는 이 한 문장이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베트남의 시각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베트남에 공격을 개시하며 내건 명분은 바로 도미노 이론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으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긴장감이 팽배했고, 미국은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도미노 이론이란,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도미노 쓰러지듯 차례차례 공산주의가 될 것이므로 그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에도 미약한 명분이었기에, 우방국들조차 전쟁을 지원하는 데 있어 소극적이었다.

  반면 우리가 베트남전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베트남은 항미구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며 중국과 일본만 없으면 역사책이 삼분의 일로 줄어들겠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중학생 때는 그저 공부량이 늘어나는 게 싫은 까닭이 컸지만, 그만큼 잦은 외침이 서러운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은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약 4,000년 전 건국된 이래 침략이 없던 적이 없었으니.


  약 800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에도 끊임없이 저항하여 자치권을 받아내고, 다시 200년이 지나 독립을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중국으로부터, 그리고 몽골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현대에 들어선 180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 하에 놓였다. 1945년 잠깐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다시 프랑스에게로 돌아가 거의 100년에 달하는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 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자 프랑스가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우며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를 몰아내며 빛을 보는가 했지만, 그 자리를 미국이 다시 차지한다.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이가 바오다이 황제에서 응오딘지엠 총리로 바뀌었을 뿐.



  나라가 너무나 평화로워도, 아니면 너무나 힘들어도 사람의 관심은 정치나 이념으로부터 멀어진다. 비록 평화로워서 무관심했던 예는, 요순시대 지금 내가 행복하니 임금 이름 따위 알아 뭣하냐던 농부 이래로 본 적이 없지만. 반대의 사례는 굳이 이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시 베트남 사람들의 염원이 무엇이었을지는 금세 알 수 있겠다. 지긋지긋한 식민지배와 전쟁의 위협으로 벗어나 다시 하나가 되고,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이루는 것. 이념과 같은 것들은 제쳐두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적힌 바와 같이 누구나 원하고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 생명, 행복의 추구 말이다.

  결국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의 전시는 마땅한 것들이 거대한 이념의 이름으로 짓이겨지는 순간의 참혹함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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