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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난돌 Jan 13. 2019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 (2)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첫째 날, 박물관이 문을 닫기 전쟁 박물관을 나와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밤 여덟 시였다. 침대에 누워 커튼을 치고 일기를 몇 자 적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이것이다. 집에서는 알람 소리를 최대로 맞추어 놓아도 부재중 알람이 10건씩 떠 있기 일쑤인데, 도미토리에서는 진동으로만 설정해도 번쩍 눈이 뜨인다. 10시간을 넘게 잤는데도 몸 구석구석이 쑤셨다. 눈, 코 할 것 없이 얼굴 전체가 퉁퉁 붓고, 종아리에 저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로비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아침을 거르기 예사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체력이 든든해야 한다. 빵에 버터를 발라 호스트가 구워준 계란 후라이와 함께 먹었다. 무엇보다 힘이 난 순간은 내 옆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쳐다보는 커다란 강아지의 꿍디를 툭툭 두드렸을 때였다. 무심한 표정과 달리 기분 좋게 흩날리는 꼬리 바람에 몸이 두둥실 날아오르는 듯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어제 3층을 보았으므로 2층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에 대한 설명과 포착된 사진 속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갓 문을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초반부의 전시는 나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던 전시 상황의 열악함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 설명과도 같았다. 그런데 전시가 계속될수록 고개를 훽 돌려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잔인함의 강도가 점점 세지며 유혈이 낭자하고 절단된 사지가 담긴 사진이 늘어났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걸 보러 여기까지 온 것인데, 나는 계속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엽제와 같은 생화학 피해 사진 역시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마주하기 힘든 진실을 담고 있는 이 전시가 한층 순화된 전시라는 것이다. 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의 원래 이름은 “미국 전쟁 범죄 전시관”이었다. 그 이름에 맞게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고 한다. 다만, 90년대 중반 미국과 수교를 맺으며 공격성을 덜어낸 것이 오늘날의 전시이다. 내 눈 앞에 걸려 있는 사진들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 전시가 순화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박물관은 그 안에 담긴 모든 울분을 한 점 남김없이 쏟아내었다기보다, 아직 풀지 못한 응어리가 산재함에도 재갈이 물려 마지못해 입을 다문 것만 같았다.


  1층까지 내려와 모든 전시를 보고 나면, 생각보다 한국군에 대한 기록이 얼마 없음을 알 수 있다. 3층에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파견된 다른 나라의 부대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그림과, 2층 고엽제 피해 전시관에서 몇 장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 전부이다. 박물관의 이전 이름처럼 대부분의 가해는 미국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우리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군 이외의 군대를 용병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거기서 일말의 책임감을 덜어도 되는 것일까?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와는 다른 질문을 들을 수 있다.

  “용병에 불과했던 한국군은 왜 그렇게 잔인하였는가?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박물관에 한 줄 적혀 있는 한국군에 대한 설명은, 그들이 참 재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참전 장교의 회고록에 따르면, 민간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 오히려 신중을 기하고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순전히 학살을 저지른 개개인에게 악한 면모가 있었기 때문일까? 반대로 내가 그 때의 베트남의 그 상황 속,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게릴라 형식으로 전장터가 따로 있지 않았다. 해당 지역의 지형과 지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식이다. 참전용사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베트콩'은 순박한 시민의 모습에 순식간에 적군으로 변했다고 한다. 습기 가득하고, 젖은 흙바닥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도 할 수 사이사이에,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총알이 내 뺨 바로 옆을 스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의 숨을 거두어갔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민간인인지 내가 방금 밟고 넘은 전우를 시체로 만든 적군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를 죽인다는 명령과 함께 내 뒤통수에도 총구가 겨누어 있는 와중에, 나는 무고한 누구도 죽이지 않겠다는 선택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까?


  만약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 중에서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아이히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전범 재판에서 스스로를 옹호하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였을 뿐,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가 실제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예컨대, 왼쪽 사람이 넘겨준 하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오른쪽 사람에게 넘기라는 지시를 받고 충실히 수행했다고 하자. 후에 그것이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며 죄를 물을 때,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는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행위가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던 구조적인 가해이고, 그래서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다시 말해, 훗날 같은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가해자가 되리라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치의 피해자들에게 연민을 보내고, 전쟁 박물관에 걸린 사진들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 내가 가해자의 자리에 서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가장 무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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