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제주편#11
일출봉과 잡화점에서 느긋하게 보낸 우리가 잡화점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다 높은 건물이나 울창한 산이 없어서 제주의 하루해는 길게 느껴졌다. 오락 재미있었어? 네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또 가요. 해맑게 웃는 진우였다. 난 그렇게 기분이 좋은 진우에게 선물같은 말 한마디를 건넸다.
“진우야. 오늘 저녁은 말이야. 스시 먹을꺼당~~~”
“헐~~~대박~~~”
진우의 괴성에 행복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난 어린 아이들에게 회나 날 것을 주지 않았다. 최근에 조금씩 연어나 참치, 굴 같은 것들을 맛보게 해줬더니 진우는 해산물을 광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진우가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 일 번은 단연 계란후라이고 두 번째가 회와 스시다. 비싸기도 하고 제대로 된 스시집이 별로 없어서 잘 사주지는 않는데 이곳 제주에 왔으니 맛있는 스시 한번 먹기로 한 것이다.
물어물어 제주 시내의 한 초밥집에 들어갔다. 2층에 위치한 초밥집은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를 위한 두 자리만 남아있었다. 우리 뒤로 온 사람들은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자리를 잡고 말차를 한 잔씩 따라 놓고 먹기 시작했다.
진우는 붉은 살 생선을 먼저 먹었고 나는 흰 살 생선을 먼저 먹었다. 와사비를 더 얹어 톡 쏘는 맛을 더했다. 회는 적당한 두께와 길이로 초밥위에 올려졌고 밥의 크기도 한 입 크기로 딱 좋았다. 초반에는 진우가 나보다 빨리 많이 먹었다. 경쟁하는 건 아니지만 한정된 예산 안에서 한 사람이 빨리 많이 먹으면 다른 사람은 천천히 적게 먹어야 한다.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래봐야 배만 부르고 살만 찐다고 위로했다. 농담이지만 왠지 서글프다. 어쨌든 진우에게 천천히 좀 먹으라고 하고 나도 속도를 늦췄다. 우리보다 늦게 온 옆 자리 사람은 휘리릭 먹고서는 벌써 일어난 걸로 봐서 우리가 그렇게 빨리 먹는 건 아니었던 듯 싶다. 우리는 천천히 이 초밥집의 초밥을 대부분 한 개씩 먹고서야 일어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밥알은 탱글탱글했고 횟감은 쫄깃쫄깃했다. 대체로 만족스런 식사였다.
그렇게 많이 먹고 나온 진우는 다음으로 찾아간 동문시장에서 어묵을 사달라는 어이없는 요청을 해왔다. 설마 어묵을 먹으려고 사달라는 건 아니지? 반문했지만 어묵을 사서 먹지 않으면 뭘한단 말인가. 내 반문이 더 어이가 없었다. 내 배가 부르니 다른 사람 배도 부른 걸로 착각한다고 하겠지만 진우의 배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진우 배는 확실히 불러도 너무 부른 배였다. 하지만 진우는 진짜로 어묵을 먹어야겠다고 했고 나는 사줄 수밖에 없었다. 어묵 하나에 어묵 국물 한 잔. 먹어도 너무 먹는다. 오히려 먹는 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동문시장에서 회를 한 접시 더 산 것은 나였다. 초밥을 실컷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산책 겸 운동삼아 시장 구경을 온 거였는데 해산물 코너에서 만난 활어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배가 불렀지만 제주에 왔으니 회는 좀 먹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어이없는 욕심이 동한 것이다. 지금 당장 먹지 않고 숙소에 가서 천천히 먹을 거라며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작은 회 한 접시를 사고 시장을 더 둘러 보려고 했는데 진우는 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난리다. 이미 밤은 찾아왔고 더이상 자기가 할 일도 먹을 일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진우는 자동차 이것저것을 만지작 거리면서 소일했다. 그 때 핸드폰에서 울린 배터리 경고음. 그 소리와 함께 나는 반짝. 진우에게 시킬 할 일이 생각났다.
“진우야. 니가 어제처럼 길안내 좀 해줄래”
“네!”
드디어 할일을 찾았다는 듯이 반가운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렵 내 핸드폰 배터리는 겨우 10%만 남았다. 숙소에 도착하려면 한참을 더 가야한다. 평소 내 핸드폰의 피로도로 보건데 저정도의 양이면 금방 파업에 돌입할 태세였다. 그리고 렌트카에 있는 네비게이션에는 우리 숙소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로 찾아 갈 수는 없었다. 어제도 진우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던지라 네비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게임 하나를 생각해냈다.
“진우야. 핸드폰이 금방 꺼질거 같으니까 니가 미리 길을 외워뒀다가 아빠한테 알려줘”
“네? 길을요?”
“어. 할 수 있잖아. 얼마 안남았으니까 몇 개만 외우면 될 거 같은데.”
“안돼요. 시키지 마세요. 힘들어요.”
“일단 한번 지도를 봐봐”
자신없는 목소리의 진우는 대꾸도 없이 지도를 훑어보고 있었다. 지도를 한참 보던 진우는 안되겠다며 시키지 말라고 했다. 역시 안되는거구나. 진우는 우리가 가려고 하는 길을 훑어보는데 자꾸 네비가 현재 위치로 가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계의 특성을 전혀 모르는 진우에게 애초부터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이다. 무리한 부탁을 했던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진우가
“아빠 그러지 말고 우리 숙소 근처에 있던 곳을 차에 달려있는 네비로 찍으세요. 그리고 거기 가서 숙소를 찾으면 되잖아요!”라는 확실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와우! 멋진 생각인걸!” 진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과 판단을 한 것이다.
나는 진우 생각에 백퍼센트 동의한다는 의미로 2%밖에 남지 않은 내 핸드폰의 네비를 꺼버렸다. 자동차의 네비는 우리가 어제와 오늘 아침 몇번이고 들렀던 북촌초등학교 정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두워진 학교 앞이었지만 여기서부터 우리 숙소를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린 피곤하지만 여전히 흥분된 가슴을 안고 숙소로 들어왔다. 비밀번호로 잠겨있는 대문을 여는 건 진우의 몫이었고 우리집에 들어가듯 마음 편하게 숙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