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으로 팀 전체가 재택근무를 하게 된 금요일 아침.
평소 출근시간대로 6시 반에 일어나서 알찬 하루를 보내겠다는 잠자기 전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알람을 20분씩 뒤로 옮기기를 반복하며 8시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도 하지 않고 노트북부터 켜는데 "입사 15주년을 축하합니다"라며 폭죽과 함께 귀여운 알림 창이 떴다.
내가 15년을 한 직장에서 버텨내다니..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를 15년 동안 꾸준히 최선을 다해서 해낸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대학교에서는 공부를 했다고 보기 힘드니 공부도 초, 중, 고등학교를 합쳐 12년이 한계였다.
그래서 더욱 대견하고 장하다고 셀프 칭찬을 해줬다.
물론 결혼생활을 16년째 하고 있긴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건 앞으로 50년 정도 더해야 하니 평가는 나중에 하는 것으로 남겨둬야겠다.
사실 첫 직장부터 계산하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21년 6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이곳은 5번째 직장이다.
조직생활 부적응자인가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 것 같다.
전공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아 최대한 전공을 덜 살리는 영업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인관계에는 자신 있었던 난, 어떤 분야든 영업왕이 될 것만 같은 생각으로 호기롭게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성과가 나쁘진 않았지만 스스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 시절 영업이라는 것이 주로 꽌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름 순수하게 살아온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실적의 압박과 맨 땅에 헤딩하듯 홀로 감당해야 하는 영업맨의 숙명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직을 거듭하며 스탭 부서에 배치돼 서비스직이 되면서 드디어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은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면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성취감을 느꼈다.
아버지 세대는 한 직장에서 30년을 일하고 후배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정년퇴임해 연금을 받고 남은 노후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물론 즐기는 걸 가장 어려워하고 할 줄 몰랐던 불쌍한 분들이셨지만.
그에 비해 요즘은 불안한 고용 환경과 줄어든 연금, 길어진 노후, 나날이 오르는 물가를 감당하기엔 직장생활만으론 사는 게 팍팍하고 힘겨워진 것이 사실이다.
요즘 학생들은 진로적성검사, 직업체험, 기업탐방 등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진로와 직업을 찾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예전엔 아무것도 없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부모님 자영업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취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회사원이 되었다.
경험은 무엇이든 좋은 거라며 다양한 직업과 직장을 거친 나를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이 나이쯤 되니 한 분야에서 오래된 장인, 실력을 인정받는 전문가의 삶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누구의 눈치나 간섭 없이,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전문가의 경지까지 오르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전문성과 주도성은 부족할지 몰라도 회사가 경영활동을 하는데 꼭 필요한 크고 작은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 온 직장인의 시간도 충분히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지런히 통근하며, 날마다 실수와 좌절, 끊임없는 자책과 아쉬움 속에서 가끔 느끼는 희열과 성취감으로 10년, 20년, 30년을 견뎌낸다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혹시 MZ세대 직장인들이 볼 때는 능력 없는 고인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도 오랜 시간 회사를 다니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바로 성실하게 견뎌내는 전문가 말이다.
직장인은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자기 일은 해낼 수밖에 없다. 꾸준히 그렇게 하다 보면 차츰 성실해진다.
그리고 조직과 사람들로부터 오는 정서적 압박을 날마다 견디고 버틴다.
그래서 누구나 직장인이 될 순 있겠지만 누구나 15년 근속에 이르지는 못한다.
인생은 참 짧다.
젊은 시절 온 마음과 열정을 각자의 일과 사랑에 바친다. 하지만 일은 끝이 없고 사랑은 변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말이지만 중년의 시각으로 보니 이 말은 틀렸다.
사실 일은 곧 끝나고 사랑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직장생활은 길어야 30년이지만 결혼생활은 60년, 아니 죽어도 상대방의 마음속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이제 일할 날이 일한 날보다 훨씬 적게 남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고인물이 되려고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15년간 내 자리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조금 손해 보고 조금 고생할지라도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성실하게 해냈다.
직장생활의 끝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저 앞으로도 성실하게 견디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조금 오버하면 회사와 후배들을 위해서도.
SDB, 정말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