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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Feb 26. 2023

어느 깨어남의 영화,
메모리에 감염되다

개인의 오랜 상처는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지진이 일어났다





어둠을 밝힌 건, 소리였다. 이른 새벽인지 늦은 밤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않을 만큼 아무 말도 없던 화면이 불현듯 깨어난 건, 예상치 못한 돌발적 사운드에 의해서이다. 무언가 충돌했거나 아니면 추락했거나, 혹은 폭발해 발생하는 굉음에 가까운 ‘쿵’ 소리가 별안간 정적을 가른다. 잠에서 일어난 여자는 조심스레 주변을 돌아보고, 하지만 카메라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거닐고, 우리는 어둠 속에 드러나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은 시간에, 아무것도 아닌 영화 혹은 현실에 오직 ‘쿵’ 소리가 들려와 시간의 자리를 확보한다. 공간의 흐름을 화면에 기록하고 있다. 지금 그곳엔 아마, 어떤 ‘멈춤’의 이야기가 시작하려 하는 참이다. 침묵을 지탱하고 있는 건 오직 우리, 관객 뿐. 영화의 주체와 객체가 어딘가 뒤바뀌어 버리는 듯한 경험은 어느새 영화를 압도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메모리아’는 시간을 반추해 기억을 되살리려는, 동시에 픽션을 빌려 우리의 현실을 도발해보는 시도였을까. 영화의 제목은 다시 한 번 ‘메모리아’, 그는 단순한 기억을 가리키는 ‘메모리’가 아닌, 고전 수사학의 암기를 수반하는 ‘메모리아’를 택했다. 인간은 망각하고, 또 기억하는 존재다.


깨어나는 시간과 추락한 기억



뒤이어 영화는 대뜸 아침이 밝아온 바깥으로 나가본다. 화면엔 일으켜 세운 듯한 ㄷ자로 주차된 차들이 보이고, 그러길 한참 조금 전 목도한 ‘어둠의 형체를 얼추 가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번엔 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흡사 이전의 ‘쿵’을 설명하는 사운드일까 생각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소리가 소리를 부르고, 소리에 소리가 반응한다. 조금 전 그곳에 침묵이 아무 말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이곳의 소음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하지만 이 클락션이 출몰해 사방을 자극하는 장면은 뙈 오랫동안, 여자가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하기까지 지속되어 온전히 소리 만이 남게 되었을 때, 그건 곧 하나의 메시지를 품은 감각으로 완성되기에 이른다. 즉, 존재하는 '무언가'가 된다. 난 그나마 여기서 ‘지금’이 얼추 새벽 즈음, 이제 막 동이 터오르는 무렵일 거라 조금은 더 확신을 할 수 있었는데, 아핏차퐁은 아마도 분명 말 되어지지 않는 것들, 기억으로만 남은,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곧 ‘어둠=정적’이란 이미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별안간 추락한 굉음 이후의 공허함과 경적 소리가 빗발치며 아우성을 만들고 소거된 후 길바닥에 남은 묘한 쓸쓸함과. 역사가 된 기억이거나 기억이 되지 못한 시간이거나. 아니면 너와 내게 비친 그 무렵 어둠이거나 혹은 침묵이거나. 

그는 처음으로 숲이 아닌 도시, 콜롬비아 시내에서 영화를 찍었고, 지금 이곳엔 소리로 시작하는, 아직 말 되어지지 않은 어느 세계가 일어나고 있다. 이만한 태초의 '시작'을 난 목격한 적이 없다. 



수상한 굉음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만큼 생소한 감각의 출발이다. ‘그 날’의 충격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제시카(틸다 스윈튼)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거리를 유영하고, 그가 바라보는, 그에게 보인 현실은 좀 수상한 사건을 자꾸만 동반한다. 알 수 없던 미스테리와 굉음 지나고, 그녀는 병원에서 잠들어 있는 동생 곁에 앉아있다. 잠과 깨어남, 어둠과 빛, 낮과 밤의 경계가 다시 한 번 그곳에 착륙했다. 하지만, 밤이 아닌 낮이 흐르는 그곳에 그 침묵은 비교적 빨리 깨어나고,  제시카는 지금 몸이 아파 입원을 한 동생 병실을 찾아 간호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싶은데, 동생은 언니에게 ‘계속 여기 있었냐’고 묻는다.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아까부터 계속 있었냐’고 반복해 묻고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까부터’, 그리고 ‘계속’는 얼마 만큼인지 언제인지 지칭하지 않고있고, 아마 주체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그건 곧 시간의 연속성을 실험하는 조건의 말이기도 하다. 과연 우린 시간을 지속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 후 동생은 조금 전 꾼 꿈 이야기를 한다. 잠에서 깨어난 그 말은 일견 제시카의 이야기처럼도 느껴지고, 그런데 그 수상한 얘기가 지금 이 생소한 상황에 약간의  주석이 되어준다. 얼마 전 동생은 길에서 차에 치어 아파하는 개를 보고도 바로 구조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는 것. 그리고 그 후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는 사실. 고통으로만 남은 전의의 이상한 자각몽. 동생은 그 사이의 상관 관계를 의심하고 있고, 제시카는 흔한 전후의 관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밤이 아닌 낮에 찾아온 꿈, 동생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밤에 불을 밝힌 낮의 뒷면, 혹은 꿈이란 환영의 실체를 그는 목격한 것이 아닐까. 


미지와의 조우, 

박테리아 메모리아



‘쿵’ 소리 이후 제시카는 도통 안정을 찾지 못하고, 어기 아닌 ‘그곳 어딘가’엔 기억에 남은 죄책감에 몸이 아파진, 보다 심연의 통증을 호소하는 이이가 있다. 병원을 나선 제시카 주위로 이름 모를 길 강아지가 어슬렁거리는데, 설마 그 개는 '그 개'가 아닐까. 아픔=죽음의 경계 앞에 돌출한 어느 시간 사이의 혼재. 제시카 등 뒤로는 버스 타이어의 폭발음에 모두가 ‘잠시’ 아연자실한 상태가 되어있기도 하다. 세 번의 알 수 없는 쿵이거나 사이렌 소리. 클락션 소리거나 누군가의 비명. 그리고 버스 폭발 이후의 알 수 없는 소동.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실체가 해명되거나 유무, 현실 여부가 가려지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지만, 그런 비현실의 출몰에 비로소 깨어나는 '시간'이 있다. 아핏차퐁은 한 인터뷰에서 ‘콜롬비아에 머물며 거리를 걸어다닐 때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인류의 기억들이 소리로 다가왔다’는 말을 했는데, 그건 아마 50년 넘는 내전의 역사를 가리키고 있는 기억. 말이 아닌 소리란, 가장 덜 문명화된 그 감각의 현실은 망각의 지난 세월을 깨어내며 '미지의 세계'와 접촉하고, 유일한 지금의 언어가 되어 오늘을 각성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를 떠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스필버그의 섬광 우주가 아닌 삶과 죽음, 꿈과 현실 그리고 영화 사이를 헤매며 ‘미지 세계’와 접속하고, 감각 마저 넘어선 어느 초월적 자리에 투항하며 때타지 않고 선명한,  영화도 아닌 영화같은 어느 '메타 피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병원에서 나온 제시카가 버스 폭발음 이후 동생의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남자는 식물 도감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제시카는 식물의 영구 보존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세균이 생명체에서 생겨났다는 게 참 신비해요.’ 이는 죽음 이후 미생물의 시간을 긍정함에 다름 아니고, 세균을 달리 말해보면 박테리아. 인간에서 자연 발생한다고 이야기해 볼 수 있는 메모리아는 곧 박테리아와 같을까. 영화는 그만큼 좀 ‘초-인간’적이다.



소리가 미리 도착한 말 이전 사인이라면, 기억은 아직도 남은 말 그 후의 잔영이다. 소리가 언어의 옷을 입고 의미화되어 현실 안에 흘러들고, 그렇게 현실을 살았던 말 그 후의 기억이란 알고 보면 사실 이미 이곳에 없는 말이다. 또 달리 말해보면 둘은 각각 말의 앞과 뒤, 즉 실체의 입구이거나 출구로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고있다. 하지만 기억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잊었거나 망각했을지언정 나와 함께하는 생존 이후 흔적이지만, 소리는 늘 나와 별 상관이 없이 외부에서 들려와(시작해) 관계를 하는, 달리 말하면 타자와의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생존 이전, 혹은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에 한 발 쯤 걸치고 있다. 나아가 그 판타지적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 즉 갑작스런 소음에 대한 반응을 현실의 말로 옮겨내려고 한다. 

소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제시카는 한 음향 스튜디오를 방문한다. 하지만 그 전, 옆옆 쯤 되는 교실에선 건축에 관한 수업이 진행중이다. 강사는 주변의 소음, 공기, 수분, 등 모든 걸 흡수하는 존재로서의 나무를 설명하고 있다. 흡수한다는 건 곧 받아들이는 일, 즉 기억. 기억이란 살아온 시간에 새겨진 화석으로 형상화될 뿐이고, 잊혀진 기억이란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뿐인 이야기이다. 제시카는 그곳에서 만난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에게 자신이 들은, 본인을 깨운 이른 새벽의 굉음에 대한 해명을 요청한다. 지구 가장 깊숙한 곳(from the earth deep)에서 들린 소리라 설명했다가, ‘수중의 좀 더 메탈릭한 에코(underwater and has a metallic echo)’라 이야기했다가. '쿵'이 되지 못한, 재연에 실패한 근사치의 소리, 그 파형들이 스튜디오 방 안에 잠시 그려졌다 곧 사라진다. 하지만 소리란 애초 다시 재연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누구도 그 소리를 다시 재생할 수는 없다. 소리는 기억이 아니다. ‘그런 소리’라는 하나의 아이디어 만이 그곳에 남았다. 그러니까 포착할 수 없는 존재로서 ‘소리’가 그곳에 기억(저장)된 것이다. 



에르나는 소리를 USB에 저장해 제시카에게 건네준다. 제시카는 본인의 난초를 보존한 냉동 창고를 그와 함께 찾으러 떠난다. 이는 곧 시간을 멈추고 ‘그 순간’을 저장하는 일. 소리가 기억으로 치환되는 순간. 무엇보다 영화가(를) 불러 일으킨 소리와 콜롬비아라는 장소의 기억이 처음으로 같은 ‘시공간’에 조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꽤 오래 이어지는 에르난과의 이 소리를 찾아가는 대목에 대해 영화의 기계적 성질을 스스로 고백하는 장면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 역시 영화라는 이미지의 환상을 스스로 풀어놓아 보려는 실패의 궤적을 기록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곧 기억과 소리 사이의 시차. 영화는 분명 ‘소리’로 시작되었지만, 그를 추동하는 건 그곳에 남겨진 기억이고, 영화가 살고있는 시간, 곧 장소는 50년 내전의 상흔이 아직 남은 콜롬비아의 거리이다. 아핏차퐁은 역사적 사건을 직접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했지만, 박테리아의 수명은 수 백년. 메모리아의 어제, 그리고 미래를 본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의 아직 일어나지 못한 짙은 밤의 소리가, 자꾸만 이상한 아우성을 내뱉는다. 


살아있는 죽음의 기억, 그 공허함에



시작은 늘 이상한 순간의 발견이다. 신비하고 난해하고 기묘하다 이야기되는 아핏차퐁 영화가 이야기를 끌어내는 건 대체로 뒤틀린 어느 틈새거나, 보이지 않는 나아가 볼 수 없는 어느 영역 이상으로 이탈한 곳으로부터의 암시이다. 이건 대체로 무어라 설명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으며 그래서 하나의 세계를 줄곧 끌고갈 수 있다. 미스테리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애초 아핏차퐁의 영화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는 '상태'의 제시이다. 즉, ‘메모리아’에서 야기된 수상한 소리와 그로 인한 사건들은 영화가 지핀 세계를 완성하는 미지의 구멍,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터널 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을 탐구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뒤, 제시카는 그 곳으로 떠난다. 자신을 ‘여행자’라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사실 가지 못할 길은 없어 영화에서 이 수상한 여정은 별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직 그에겐 그곳으로 향하는 절대적 이유가 존재하고 그건 곧 소리의 기원을 찾아가는, 즉 과거로의 여행이다. 애초 기억이란 공기의 흐름을 타고 확산하는 소리와 달리 멈춤, 정지하며 저장되는 현실의 산물, 즉 (누군가의) 이동을 필요로 한다. 



제시카는 그곳에서 또 한 명의 에르난(엘킨 디아즈)을 만나게 된다. 함께 소리를 연구하던 에르난과는 다른 좀 더 나이가 지긋하고 살집이 있는 수염도 덥수룩한 에르난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린 이전 '에르난'이 퇴장하는 장면을 목도한 적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에르난의 부재’를 알아차린 장면이 수상한 위화감을 남기고 지나갔다.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찾은 스튜디오에서 에르난이란 사람은 애초 그곳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서사적 흐름을 보면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 마치 ‘쿵’이란 소리가 다시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사라진 것과 같이, 그 소리를 함께 찾아가던 ‘에르난’ 역시 지금 이곳에 없다. 다만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또 다른 ‘에르난이 지금 이곳에 그와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살이 찐 에르난은 말한다. 자신은 모든 걸 기억하고, 꿈을 꿔본 적이 없고 태어나고 자란 ‘이곳’을 떠나본 적도 없다고. 그래서 지나간 기억을 방해할 새로운 기억이 없고, 가장 완전한 기억을 갖고있다고. 마치 태초의 기억, 소리로부터 분리된 원형의 시간을 표상한다. 그는 작은 오두막집에 거주하며 근처의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아간다. 지금도 앞 갯물에서 도미 몇 마리를 잡아 비닐을 벗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제시카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이 대목은 아핏차퐁이 영화를 지속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치한 다소 장치적 요소처럼도 보인다. 갑작스런 또 다른 에르난의 출몰은 수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소리를 수집하고 믹싱하고 만드는 '에르난', 즉 소리의 마스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선 분명 그만큼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상대로서의 매개체가 존재해야만 했다. 제시카는 아마 ‘쿵’ 소리를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또 다른 에르난에게 자연스레 끌렸을 것이고, 그건 전과 다른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소리의 기원을 찾기 위한 나도 모를 본능이었을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 제시카는 유물 조사를 위해 공사중인 터널을 지나왔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한 여정이, 그를 산 넘어 강 넘어 ‘미지의 세계’로 이끈 것이라고, 난 감히 오늘의 실패를 무릎쓰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깨어남의 영화



제시카는 남자에게 잠을 자보라고 부탁한다. 이 또한 참 이상한 대목인데 자신에게 도착한 소리, 그 기억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 잠깐의 멈춤이 필요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여기서의 이 잠, 멈춤은 이전 믹싱룸에서의 사운드를 실험하는 그 작업과 동일한 맥락에서 정확하게 일치한다. 남자는 다소 당황한 듯 싶지만 땅에 누워 잠에 든다. 그가 잠든 시간 세상은 잠시 멈춘 것만 같다. 바람 소리, 강물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고 원숭이가 대화하고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며 (시간이) '멈춘 장소'로서의 그곳을 재연한다. 이는 곧 기억을 저장하는 매개체로서의 에르난을 입증하는 과정이고, 그 때의 그는 한참 전 건축을 강의하던 수업 중 주변의 공기, 물, 바람, 기운을 흡수하던 한 그루 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순간 영화를 보는 행위에 어떤 생소한 이질감이 발생하는데, 아핏차퐁은 소리의 기억을 찾기 위해 지금 무려 영화를 멈춰세워 보려한다. 영화란 환상이 멈추면서, 그곳에서 ‘영화’를 도려내면서 남아있는 것들을 지그시 쳐다본다. 이를 우린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소리가 제거된 기억? 어떤 감염된 시간의 정지 상태? 아니면 박테리아같은 메모리아의 생성?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기억이란 생명체가 출현한 것일까.



이후 제시카는 남자를 조금 더 신뢰하는 듯 보이고, 그에게서 자신의 잃어버린 감각(기억)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는 드디어 기억과 소리가 적절한 자리를 찾아 서로 ‘접합’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던 그 '시간=자리'에 둘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교감 신경에 안테나를 맞춘다. 타인의 기억은 내게 어떻게 공유될 수 있을까. 혹은 전의되어갈까. 어쩔 수 없이 이 대목에선 콜롬비아라는 장소성, 그곳의 역사를 들춰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역사는 산발적 1인칭의 사운드, 절대적이고 가장 드넓은 우주에서의 실체를 가리킨다. 동생의 환각, 곧 상실이 제시카에게 전이되었던 것과 같이 상처의 기억이란 그저 잠자고 있을 뿐 세상을 떠돌고, 동생의 남편이자 소설가인 그는 도감에 박제된 수많은 박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기억을, ‘메모리아’라 말하려 했다. 동생이 퇴원하고 제시카가 우연히 방문하게 된 곳도 유골을 연구하는 벤치 뒤에 숨은 연구실이다. 그곳엔 오히려 죽음이 더 살아있고, 침묵이 더 요란스러우며, 어둠이 할 말이 더 많다. 기억이란 가려진 망각의 살아있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에르난으로 시작해 에르난으로 저무는 어느 하루에 세상은 지진이 발생으로 두 명의 남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한다. 터널을 다시 건너온 그곳에 소리를 잃지 않은 기억과 드디어 기원을 찾은 소리가 하나의 완전한 시간을 창출한다. 그저 뒤늦게 리포팅되는 나레이션의 뉴스를 배경으로, 우린 얼마나 기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그건 하나의 세균이거나 벌레, 하늘로 비상하는 박테리아가 되어있다. 남은 건 소리 뿐, 세상은 어둠이다. 아피찻퐁은 지금, 눈을 감고 시작되는 기억의 이야기에, 눈을 뜨라고 경고하고 있는 걸까. 오직 각성을 위해 영화가  태어나고, 그렇게 다시 실종되었다. 그렇게 '남겨진 이곳'엔 단지, 어느 깨어남 이후 기억을 잃은 소리 만이 아우성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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