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을 것이냐 사랑할 것이냐
업무특성상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가진 것이 많아 현생이 너무 행복해서 이것들을 남겨두고 가기 아쉬운 경우와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이 많아 아직은 가기 아쉬운 경우인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현재 소유한 것과 미래에 소유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렇지만 소유란 끝없는 블랙홀 같아서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정작 원하는 것을 소유해도 찰나의 기쁨만 줄 뿐이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결국 죽는다는 것 하나뿐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한다면 소유한 것들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이렇듯 소유적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의 확실성 앞에서 절대적인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허무와 무기력을 딛고 일어서서 어떻게 다시금 살 수 있는가? 왜 나는 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소멸할 내 삶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를 소거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참된 것인가? 불멸인 무언가가 있는가? 이 무한한 세상에서 유한한 내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이러한 실존적 질문들은 꼬리의 꼬리를 물게 되고 결국 허무감에 종착할 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물질주의사회가 인간에게 세뇌시킨 소유적 실존양식에 따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떤 것을 가져야만 혹은 이뤄야만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환상은 그것을 갖지 못하면 우울하게 하고, 가졌다면 잃을까 봐 불안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소비되는 대상이므로 더 큰 집, 더 높은 명예, 더 많은 인기와 사랑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결코 충족되지 않는 끝없는 소유의 블랙홀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면 삶에 집착하게 된다. 프롬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고 소유가 아닌 능동적인 체험에 근거한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들을 가지면 ‘사랑받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실제로 좋은 대학/직장/외모를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것들을 가져도 삶이 무의미하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은데, 프롬에 따르면 모두 소유적 실존양식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사랑받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 사랑받기만을 기다리면 나는 애써 준비한 조건들을 갖춘 열지 않은 선물상자 같은 ‘대상’이 되기 때문에 사랑받기 전까지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 없다. 설사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대상이 되더라도 그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고 인식하게 되니 그 조건들에 집착하게 된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소유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경험하는 것에 생생하게 집중하는 것,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 것, 사랑받기 위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과정에 있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실존하는 것이다. 고정적이지 않고 생동적으로 세계와 실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는 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기에 유동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어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불안하지도 가진 것이 틀렸다고 우울하지도 않게 된다.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사랑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깨닫고 성장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 내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한 나와 타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불운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내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