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알람이 떴다. '작가님이 보고 싶습니다. 글을 못 본 지 무려 60일이나 되었네요'.
작년 브런치북 공모 이후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해이해져 자주 들여다보던 브런치에 손을 놓은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누군가는 글을 써야 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서,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생각과 목소리를 뱉을 수밖에 없어서 쓴다고 했는데 요새의 나에게는 그런 절박함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많이 없다.
더군다나 꾸준히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다. 절박함은 둘째치고 훈련이라도 되어있다면 무엇이든 써 나갈 것인데.
오히려 글을 정말 쓸 수밖에 없었던 때는 내가 많이 아팠을 적이다. 아토피 때문에 온 군데군데가 화끈거리고 평소에 괜찮았던 곳에서 진물이 나고 사람 눈조차 마주칠 수 없어서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을 때. 그 당시에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글 쓰는 일 밖에 없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 건강한 몸이라는 토대 위에 정상적인(?) 생애주기를 살아나가고 있을 때, 언제쯤 나을 수 있을지 예측 조차 할 수 없는 지난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억울해서. 그래서 당시엔 내 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마구 터져 나왔다. 그렇게라도 내 삶을 재생산하고 싶어서 그래도 이런 나 자신을 나라도 이해하고 싶어서.
요즈음은 쓸 말을 잃은 대신 한 줌의 건강을 얻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몇 해 전보다 몸 상태는 훨씬 안정적 이어졌다. 그럼에도 완치가 된 것은 아니다.
몸이 그나마 좋아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꼽아 보자면 새/헌 집증후군(30년이 훨씬 넘은 집을 셀프리모델링을 하면서 들어가서 새/헌 집 증후군의 모든 요소가 다 있던 집)을 앓았던 그 전전 집으로부터 이사를 나온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생활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예전 새/헌 집증후군 집에 살 때는 어떤 발악을 해도 낫지 않던 몸 상태가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오면서부터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데 나에게는 생활관리는 두 번째 문제였고 일단 나를 살리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더 큰 변수였다. 그리고 여전히 전세집을 전전하는 나는 이사를 해야 할 때가 두렵다.
1여 년 전에 이사한 전셋집은 거금을 들여 친환경 벽지를 발랐고, 예전보다 훨씬 더 골고루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내 경우엔 오히려 가려먹을 때가 오히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최근까지 나를 괴롭히던 입 주변 아토피는 일회용 마스크에서 면 마스크로 바꾸면서 훨씬 호전되었고(대신 면 마스크는 여러 개 구입하여 그날 쓴 것은 세탁하여 돌려 쓰는 방식으로 청결함을 유지한다), 우연히 지인에게 받은 의료용 로션이 잘 맞아서 제품 여러 개를 덧발라도 다음 날 아침이면 쩍쩍 갈라질 것 같은 건조함이 많이 잡혔다. 요즘 들어 해이해지기는 했지만 잠은 늦어도 꼭 12시 전에는 들려고 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꼭 따뜻한 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요가를 10분 정도 하면서 림프절에 독소를 빼주는 운동도 같이 병행한다. 독소를 빼주는 것이라 봤자 겨드랑이, 팔 접히는 곳, 사타구니, 신장이 위치한 등 쪽(열중쉬엇했을 때 주먹이 위치한 위치), 다리 접히는 곳을 아주 약하게 50번씩 두드려주는 게 다지만 확실히 효과는 좋다. 한 번은 일주일 정도 두드려주지 않았더니 팔 접히는 곳에 다시 발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하지, 예전에 아플 때는 좀 적당히 해야지 싶은 것들이 이제 몸이 좀 괜찮아지니까 이것저것 하고 싶어 져서 막 욕심이 난단 말이야"
예전 내가 아토피로 고생할 때, 암투병으로 많이 힘들어했던 친구가 나와 동시에 호전기를 겪으며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렇게 치면 나도 참 간사한 걸까? 아토피로 그렇게 고생을 할 때는 몸속에서 터져 나오던 언어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휘발되어 버린 듯하다. 아토피는 내 삶의 중대성에서 한 차례 밀려나 버렸지만, 그럼에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증세의 경중은 있겠으나 언제까지고 나는 이것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은유의 신작 '글쓰기 상담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글쓰기는 기억 작업이고 자기 구원이라고. 작가 자신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법, 고통이 조금씩 견딜 만해지는 과정을 기록하면 이걸 읽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정도의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본 거라고.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이 쓴다" 라는 말처럼.
몸의 고통은 내 글쓰기의 주요 동력이었는데, 몸이 회복되며 안쓰는 고통보다 쓰는 고통이 더 커져버릴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쓰는 고통을 택하겠다.
자기 구원을 위해 글을 쓰는 일들이 있다면 점차 그로 인해 고통이 견딜 만해지기를... 그리고 비로소 글씀의 동력이었던 근원적인 고통에서 점차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