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모폴리턴 아나키스트로 살고 싶소이다만...
오전부터 집에 벨이 울렸다.
예상치 못한 벨은 그 자체로 기분을 나쁘게 한다.
늘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을 동반했으니까…
프런트도어를 비추는 모니터를 보니 등기를 든 집배원이었다.
예상치 못한 등기도 그 자체로 늘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등기를 가져다 주는 전담 집배원 조차 반가울리 없었다.
더군다나 집배원의 기색과 행색에서 조차 어딘가 좀 불쾌한 부분이 있었기에...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컴플레인 전까지는 한동안 늘 배달할 등기가 있어도 늘 벨도 누르지 않고 늘 벨 눌렀다고 거짓말 하고 방문 했었다는 스티커만 붙여 놓고 그냥 쌩 가버리고, 본인이 있는 곳 까지 오라는 둥의 불친절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집배원이 엘리베이터로 올라오는 동안
나는 평소처럼 얼른 모자 행거로 달려가 아무 챙모자를 집어 들어 푹 눌러쓰고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완전 별로였다. 호박에 천쪼가리 하나 얹힌 느낌이랄까?
“됐다,됐어!” 나는 바닥에 모자를 집어던지고 당당한 호박의 기색으로 문을 활짝 열고는 집배원에 짧은 인사를 건넷다.
“서명 정자로 부탁드립니다.” 집배원은 내게 서명을 요청하였고,
내가 서명을 하는 동안 혼잣말을 했다. “이건 또 왜 수신확인 등기인 거야?”
-‘수신확인’이 정확한 워딩이었는진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반드시 본인 확인이 필요한 등기라는 뜻의 용어를 사용하였었다.-
집배원의 말에 나의 불안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대체 뭐길래… 설마 집에서 당장 나가라는 주택공사의 독촉장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싸인을 빠르게 했다.
그런데 마음이 급해선가 서명이 자꾸 엉뚱하게 써졌다.
도무지 내 이름 석자 하나가 제대로 쓰여지지가 않았다.
집배원은 리셋 버튼을 두어 번이나 눌렀다.
머쓱한 나는 들리게 혼잣말을 말했다.“아아…자꾸 왜 이러지...”
그랬더니 집배원이 말했다. “아잇, 이놈의 기계가… 오늘 하루종일 이랬어요. 허허..”
하루종일 이랬으면 되게 짜증 났을 법도 한데 그렇게 말을 건네는 집배원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아이고야…그래서 어째요...” 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집배원.. 오늘 좀 새롭네? 늘 세상 모든 짐 다 짊어진 느낌이더만… ”
무슨 변화냐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변화의 요인이 어쩌면 나 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나도 평소와 다르게 문을 활짝 열면서 웃으면서 반가운듯한 몇 마디 인사를 건넸었으니...
어쩌면 그게 좀 달라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일전에 그 집배원을 대할 때 내 기운들은 어땠나 돌아보니,
모자를 푹 눌러쓰며 불안함을 감추고 그 집배원을 얼른 돌려 보내는데만 급급해 하던 어두운 기운의 내가 보이던게 아닌가?
집배원의 어두운 기운은 어쩌면 내가 비췄던 반사기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작은 대화에서 등기의 부정적인 기운이 조금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 일은 아닐꺼야" 하면서 등기를 들여다 보니 수신이는 국가인권위원회였다.
약 1년 전, 이맘때 쯤에 진정을 넣은 사건이 있었던지라 딱히 놀랄것은 없었다.
다만 그간 깜깜 무소식이었는지라
그냥 자기네끼리 무랴부랴 대충 마무리시켰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소식을 받게 되다닌 신기하긴 했다.
"그래도 계속 가지고는 있었나 보군.."
그래도 당장 집에서 나가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는 주택공사 개소리 문서를 아닐 것임에 일단 안심을 하고 등기를 뜯었다.
-올 해 봄, 관리인이 문 두드렸는데 집에 없었다고 계약 해지 등기를 보낼거란 협박 쪽지를 받은 적이 있었던지라...-
등기를 들춰보니
피진정인의 합리적 사유가 있었고 진정인에 불리한 대우가 아니라... 어쩌구 저쩌구... 적혀 있었고
내용인 즉 인권 위원회 진정 사건이 기각되었다는 통보였다.
“아무래도 개소리 등기는 마찬가지군...”
그간 나는 이 나라의 시민으로, 여성으로, 노동자로, 세입자 등등으로 살면서 겪은 별별 고충 때문에 갖가지 트라우마들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재작년 한 직장내에서 있던 매우 부당한 고소했던 건들이 줄줄이 다 기각 되면서 이 국가가 굴러가는 행태와 나의 위치를 처절하게 실감하고,
도무지 이 나라에서 정상적인 일상 사회생활이 불가능하였기에 일단 이 비정상적이고 가식적인 국가를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가 막 끝나던 시기라 어쩐지 떠나려 해도 입출국 심사가 까다롭게 변동된 경우도 많았고, 안그래도 에너지가 다 소진된 상태에서 그런 세세한 부분들을 다 알아보고 챙겨 나돌아 다닐 엄두도 도무질 나질 않았다.
거기다 내 환경으로 말 할것 같으면
한가로이 여행 할 경제적 여유도 없고 언제든 먹고 사는데 써먹을만한 좋은 테크닉 하나도 없는 처지인데다,
나이 또한 적지 않은 나이인 만큼 그저 불확실한 미래를 떠 안고 그저 도피성으로 떠나 봤자 더 이상 즐기지 못할 게 뻔했기에, 그저 떠나고만 싶은 마음만 무겁게 가슴에 내려 앉을 뿐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위에서만 반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다, 작년 이맘때 즈음 해외 나가서 봉사활동을 한다면 좀 더 의미 있겠다 싶어, 봉사 활동을 알아보다가
코이카란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볼리비아 취약 여성 계층에게 예술 교육을 하는 봉사 단원모집을 보게 되었다.
새해에는 이 나라를 떠나, 여성의 인권의 신장을 위해 봉사를 하며 지내 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주저 없이 바로 지원을 하였다.
모집 공고는 불친절 했다. 뭐가 얼마나 어떻게 지원되는지, 볼리비아 어디에 지원되는지 구체적인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공고를 통해 알 수 있는건 연말에 한국을 떠나 볼리비아 아마존 지역의 여성들을 위해 1년간 봉사를 한다는 것과 예술분야교육 단원이 필요하단 것, 가기 전에 며칠간 교육 합숙 연수를 받아야 하고, 내게 지원되는건 비행기 왕복티켓, 숙소, 교육활동비가 주어진 다는 것 뿐....
이렇게 허술한 모집 공고에 위험을 감수하고 지원할 사람이 많으려나 싶었는데
1차 서류 심사에 통과 되었단 연락을 받고 도착한 면접 장소엔 꽤나 사람들이 많았다.
예상보다 경쟁률이 치열하던 사실은 면접이 같이 면접을 보았던 분들과 면접장을 나서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전까진 당연히 붙게 될꺼라 믿었고,
이래저래 패기가 없던 나는 될래면 되고 말래면 말라는식으로 별 기대 없이 그저 즐겁게 면접을 봤는데
그래서인지 면접이 비교적 잘 풀렸고
2차 면접 심사에도 통과하여 3차 신체검사까지 받게 되었다.
신체검사는 정말 엉망징창이었다. 사전 신체 검사 장소 시간 등의 안내도 엉망이었고,
검사 과정도 엉망이었다. 간호사들도 검사에 대해 잘 몰랐고, 직장 입사 검사도 아닌데 질문지에는 온통 직장과 관련된 설문이 있질 않나 어쨌든 사전에 봉사 단원의 건강을 체크한다는 취지와는 매우 무관하다고 느껴지는 정말 그저 단순히 절차와 형식을 위한 검사였다.
그 중에 유방 방사선 검사가 필수로 포함되어 있었다.
기존에 방사선 검사가 유방조직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는데
일괄적으로 모든 여성단원에게 방사선 검사부터 실시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매우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그래도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검사를 받았다.
검사는 눈물이 절로 흐를 만큼 상상 이상의 통증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이후에도 한동안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아픈 생애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검사였다.
어쨌든 모든 절차를 코이카에서 하라는 데로 마치고, 신체검사 결과 또한 이상 없이 동년배의 상위권으로 나왔다.
최종 봉사단원 합격 문서가 온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내게 불합격할 이유는 없었으니
앞으로 내가 할 것은 합격 통보를 기다리며 교육소 입소와 1년간 볼리비아에 살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간단한 옷가지와 가방도 사고, 캐리어도 알아보고..
동생에게도 알렸다. 인터넷 계약 등 1년간 집을 비웠을 때를 대비 사항도 알아보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런데 며칠 후, 신체검사를 받았던 병원으로부터 짧은 문자 메시지가 왔다.
받았던 유방검사에 문제가 있으니 다시 검사를 받아서
제출 하라며, 제출하지 않을 시에 불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유방조직이 치밀하게 있어서 방사선 검사로 측정이 되지 않았으니
비용과 시간, 병원 등을 알아서 알아보아 정상 결과 통지를 받아오면 합격 처리가 될 것이란 것이었다.
치밀 유방 조직을 지닌 한국여성은 80프로.
그 여성들은 애초에 방사선 검사로는 결과를 알 수 없다.
오히려 여성들에게 방사선 검사는 유방암을 초래할 수 있는 악영향을 미친다.
특히나 유방 조직이 유연한 10대, 20,30대의 젊은 여성의 유방에 방사선은 치명적이다.
사실 다른 검사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추가적인 비용과 시간, 에너지를 할애하여 다른 검사를 받아야 하고
유방조직이 결과의 승낙 여부와 직결된다니 황당했다.
코이카 측과 코이카 연결 대형병원에 담당자에 전화를 걸어 문제를 제기했다.
신체에 수많은 기관이 있고, 세상에 수많은 암이 있는데 왜 유방조직만을
최종결과의 승낙을 좌우할 정도로 이렇게나 중요하게 여기는가?
또 유방검사결과가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이면
애초에 유방암의 여부를 알 수도 없는 방사선 검사를 왜 일괄적으로 해당시켜 정상 유방조작에 방사능 노출을 시킨 것인가?
여자 지원자란 이유로 앞뒤 가리지 않고 논란이 많은 방사선 검사를 시행하여 방사능 노출 시키고, 합격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전 세계의 어떤 절차에서도 볼 수 없는 인권유린 행위로 보여진다.
남자도 여자도 다 같이 유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데 -치밀조직을 지닌80프로의- 한국의 여성 봉사 단원 지원자는
봉사를 하고자 할 때조차 남성 보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 에너지를 투자하고, 심지어 방사능 노출로 인한 악영향을 감내해야 하는가?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런 유방암에 걸리면 본인이 책임질 거예요?”라는 반문과
대충 동네 아무 병원이나 가서 대충 몇 만 원 내면 의사가 대충 써줄 테니 이틀 내로 제출하지 않으면
어차피 뒤에 많은 지원자들이 있으니 유방조직에 대해 증명을 하지 않으면 불합격시키겠다는 말로 답변이었다.
사실 세상 부당하고 이상한 일을 겪어 본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
이 정도는 "역시 제대로 운영되는 곳이 없네..." 하며 대충 그들의 말대로 대충 아무 병원 가서 대충 아무 유방 검사 받고 대충 "유방암 아닌걸로 보여지긴 하는데 유방암 안 걸릴것도 같은데 "이런 의사의 멘트가 적힌 증명서를 대충 낼 수도 있었고 “역시 또 이상한 사단법인에 걸려들어 시간 낭비 한 거였네” 하
그들의 말대로 깔끔하게 잊고 다른 플랜을 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코이카는 정부지원금을 지원 받아 운영되는 공적 기관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지원한 이 프로그램은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봉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단원을 선발한다면서 젊은 여성들의 정상적인 유방에 다짜고짜 방사능에 노출 시켜 피폭될 위험을 높이고, 유방조직이 치밀하단 이유로 예비 유방암 환자 취급하며 봉사단원 자격 박탈이라니…
이건 한마디로 내 유방 조직 모양 하나로 인해 선발과정에 동원된 인력과 비용 등 정부세금을 낭비하는 짓이었다.
이렇게 또 탈락된 여성이 나뿐이었겠는가?
그 속에서 이득 되는 건 재검사로 인해 단체로부터 검사비용을 추가로 받는 병원 일뿐…
여성 인권 유린이라 느낀 이 절차를 묵도 하면서 봉사단원 합격을 받아 내는게 무슨 의미일까?
볼리비아의 여성 인권을 신장 시키러 가기 전에 나는 대한민국의 여성 인권부터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신문고를 통해 봉사단체와 단체를 관리하는 공공기관, 국가인권위원회 이렇게 세 군데에 이 문제를 제기를 하였었다.
그러나 두 곳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길게 푼 비논리저인 답변으로 이 문제를 종결시켰고,
국가위원회에선 연락을 주어 진정 사건으로 다룰만한 사안 여부를 파악한다며 연락을 주었다.
한시간 가까이 되는 긴 통화 서두와 말미에 나는 반복하여 담당자에게 말했다.
단순히 사회가 보다 더 공정하게 가길 바라는 공적인 취지에서 하는 것임을 밝히며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절차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중한 시간을 내여 이러한 진정을 하는 이유는
좋은 취지로 지원하는 한국여성 봉사단원 지원자들에게 유방암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유방암 발생 확률만 높이는 검사를 종용하고, 세계 유래 없는 유방조직 이슈로 탈락을 시키는 이런 사태를 그냥 눈감을 수가 없어서라고…
나는 이 진정이 내 사적인 이득과는 반하는 행동인 만큼 부디 이 시간이 허비되지 않도록 철저히 검토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그로부터 일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받아 본 결과는 역시나 실망 없이 실망스러웠다.
"이놈의 세상, 나중에 힘있는 누군가 죽어 나가봐야, 그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봐야,
그제서야 부랴부랴 시정 사안으로 올리게 될테지...."
그 실망스런 통지는 이런 문구로 시작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