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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리아 Apr 06. 2024

장 뽑고 장 보기

대표도 뽑고 대파도 사고.

투표장에서 오는 길

장에 들려 대파 한 단을 샀어요

장 가는 길에 살까 하다

장에서 오는 길에 샀어요


대파가 너무 비싸서

한 동안 많은 음식에서 대파를 뺐었어요


주방에서 대파가 사라지는 건 큰 문제지만

다른데선 대파가 뭐 그리 대수겠냐 싶은데

대단한 민주주의 국가에선

대법원에 갈 수도 있겠더라고요

대충 요즘 대세가 그렇더라고요


구워 먹을까

무처먹을까

끓여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게 대파라지만


국에 넣을까

무침에 넣을까

구이에 곁들일까

어디 곁에 넣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게 대파라지만


투표장에 갈 때만큼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게 대파더군요


그래서 투표장 가는 길에 살까 하다

장에서 오는 길에 샀어요

많은 걸 대변하는 대파가 점점 좋아져요

대파색이 파란색도 빨간색도 아니라 천만다행이에요


우선 냉장고에 잠들어 있는 콩나물을 깨워

정체된 것 같은 속을 뚫어 줄 시원하고 칼칼한 콩나물 국을 해 먹을 거예요


대파 빠진 콩나물국을 먹어 보셨나요?

콩나물 국을 먹어도 먹는 거 같지 않는 느낌을 받고 싶을 때 제격이죠


이러나 저러나

난 그저 이제는 대파 눈치 안 보고

여기저기 팍팍 넣어 요리해 먹고 싶은 마음 뿐이에요






투표장에 사람이 가장 적을 것 같은 날을 고르다가

사전 투표 첫날 가기로 했다.


사전 투표 첫날인데도

3층의 투표소 줄은

3층과 2층 복도를 지나 1층의 입구부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 뒤에 선 여자는 내 뒤에 바싹 붙어 수시로 자신의 어깨와 가슴을 내 등에 밀착시켰다.

내 앞에는 연로한 할아버지가 빨간색 장바구니가 달린 녹슨 쇼핑카트를 계속 왔다 갔다 휘두르고 있었다.


저 녹슨 카트에 몇 번 안 신은 내 하얀 운동화가 잠시라도 닿기라도 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운동화 수명이 다할 각이었다.


순간 지난 대선 때가 그리워졌다.

그 때 있었던 투표장 바닥에 있던 발바닥 표시와

앞사람 뒤사람과 거리 간격을 유지해 달라고 수시로 외치던 안내원들의 목소리, 신체 접촉을 민폐로 생각하여 각지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분위기...

누가 다시 코로나 팬데믹 때의 그 거리두기 소환 안 해주나 싶었다.


긴 기다림 끝에 투표용지를 받았지만

또 다른 줄로 가서 또 줄을 서야 했고..


투표 인증샷을 찍으려던 생각일랑 진즉 싹 다 잊혀지고,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얼른 후다닥 투표를 해치우고

그 곳을 얼른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투표장을 오가는 거리도

형형색색의 광고 선전에 정신이 사나웠다.


"거리 간판이고 정치고 색 좀 빼면 안 되나?"


무엇 보다 색과 소리에 민감하고, 전체주의를 극도로 경계하는 나는

특정 색과 소리가 어떤 특정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 매우 싫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다양성과 평화의 상징이 된 것조차도 싫다.

모든 색과 소리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어야 하거늘..


그래서 예술이 정치를 사상을 끌어다 쓰는 건 용납이 되는데

정치가 사상이 예술을 끌어다 쓰는 건 도통 용납이 되지 않는다.


다음 대선 총선 누구가 됐든

상업적 정치적 광고 선전 간판에 컬러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별도로 제작하지 않은 기존의 음악을 사용하는걸,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단 하는 사람을 무조건 뽑아야지 싶었다.


이래저래 자꾸 여기저기 곳곳마다 끼어들려는 것들에 매우 곱지 않은 마음이 든다.

얼마 전엔 총선 얘기로 가까운 지인과 다툰 적도 있었는지라..


한 번도 투표를 안 해 봤다길래

나는 가볍게 같이 투표나 하러 가자고 했는데,

그는 가볍게 정치엔 관심이 없다며, 다 똑같아 보여서 아무도 안 뽑겠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 가볍게 건넨 말 한마디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하며 서로의 비방전이 되었다.


“아! 너무 싫어! 특히 너 같은 요즘 이십대 남자 애들... 팔짱 끼고 중립에 서서 방관자로 살면 정치색 띄는 사람들보다 뭔가 더 대단한 거 같지? 누군 뭐 좋아서 투표하냐?

내가 뭐 시간이 남아 돌아서 정치에 신경 쓰는 거 같아? 나도 이 나라고, 대한민국 정치라면 아주 지긋지긋해! “ 나는 말했고


”나도 목소리 높이며 정치에 열 올리는 나이 많은 여자 너무 싫어!” 그도 말했다.


내 입장은 단지..

정치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도.. 차악이라도 선택을 하는 게,

민주주의가, 나라가 연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투표권은 가능한 행사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아까 투표 대기 할 때 내 앞에 서있던  빨간색 장바구니를 단 녹슨 카트를 끄는 할아버지는 투표장 내에서도 사람을 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정신없이 활보하고 다녔다.


”저런 사람들은 굳이 투표장에 안 나오는 게 나은걸도...”

그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열을 올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매우 이상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유토피아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빨간색 녹슨 카트는 또다시 내 앞을 향하여 다가오더니

내 앞에 서있던 한 중년 남성의 뒤꿈치를 거침없이 치고 지나갔다.


그때부터 그 남자의 시선이 그 노인에게 고정되어,

노인이 향하는 데로 그 남자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쪽 줄이에요.”

그러나 노인은 들은 척 만 척 어물쩍 어물쩍 서성였고,


그러자 남자는 노인에게 다가가 손짓을 하며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어르신, 이 줄에 계시면 돼요.”

그리고는 노인의 카트를 들고 뒷걸음칠 치더니

“제 앞에 서세요. 어르신.”

하면서 자기 앞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노인은 어떠한 대꾸도 기색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노룩으로 내 앞에 선 그 남자의 앞에 섰다.


물론 한숨을 쉬진 않았지만, 마음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러니 청년들이 투표장에 오고 싶지 않지…

챙겨야 할 어르신들은 많고..  

어르신들 챙겨 놓으면, 막상 성과는 어르신들이 챙겨가시는 듯 하니…”


그 녹슨 카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느새 나의 시선도 정면을 향해 안정을 찾게 되었다.


내 앞의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분은 뭐 하시는 분일까?”

"어떻게 저 녹슨 카트로 자신의 신발을 치고 지나가고, 고마운 기색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밖을 향해 날 서있던 신경들도 내 안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쩐지 투표를 기다리며 앞 뒤의 사람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서 있던 나 자신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 뒷 모습은 어떨까?"


이래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로구나 싶었다.

세상 어딜 가든 배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지천이라도

세상 나보다 훨 더 낫고, 보고 배워야 싶은 사람도 무수히 존재하는 법이니까…


투표장에서..

내가 모범적인 정치가와 정당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으나,

조금 더 이상적인 정치가의 뒷모습 상에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앞에 어르신 보다 더 늦게 투표소에 들어갔지만

더 빠르게 투표를 마치고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민첩하고 묵직하고 가벼웠다.


투표가 끝나고…

오는 길에는 대파 한 단을 샀다.

정체된 것 같은 속을 시원하게 뚫어 줄 콩나물국을 먹을 생각이다.

너무 비싸서 한 동안 대파를 안 넣고

콩나물 국인 듯 아닌 듯 대충 만들어 먹었는데

이번엔 콩나물국 다운 콩나물국을 제대로 만들어 먹어 봐야겠다.



이번 총선 투표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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