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는 길
여행자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줄 아세요?
모른다는 것.
낯설다는 것.
아무런 기억도 생각도 없이
무엇도 정의되지 않은
여백 많은 빈 공란엔
숨이 트이는 구석이 있어요.
스마트 폰 없던 시절,
혼자 배낭을 메고
바다 건너 먼 낯선 나라를 간 적이 있어요.
나는 쉽가리 길을 잃는 길치에요.
그래서 늘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봐야 했어요.
“혹시 거기 아세요?”
그러면
모여서 잡담하던 동네 어르신들
벤츠에 앉아 있던 노숙자
하굣길 집에 가는 아이들
구멍가게 주인아줌마
앞서 가던 또 다른 여행객...
나는 낯을 매우 많이 가리지만
낯선 길 위에서는 좀 더 용감하고 친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길을 잃어서
새로운 장소를 만나게 되었고
길을 잃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어요.
예상치 못 한 새로운 이벤트는
길을 헤매다 우연히 마주친 눈빛에서 비롯되기도 했어요.
오늘은 모처럼
익숙한 동네인 합정 들렸어요.
용무가 끝나고 달을 가로등 삼아
홍대를 거쳐 8km 떨어진 집까지 걸어왔어요.
여행자가 아닌 자의 슬픔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
많은 기억과 생각이 점철되어
곳곳마다 정의된
빽빽이 채워진 공간엔
숨이 막히는 구석이 있어요.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첫 자취는 합정에서 했고요.
이 동네에 오기 전까지는 홍대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이쪽 동네는 늘 새로워요.
그새 또 큰 건물이 새로 지어져
대형 브랜드의 새매장이 오픈했더라고요.
그럼에도 이쪽 동네는 늘 새롭지 않아요.
그새 또 큰 건물이 새로 지어져
대형 브랜드의 새매장이 오픈했더라고요.
며칠 전에 나도 그 브랜드의 제품을 새로 샀었지요.
새롭지 않은 새 제품을요.
길을 걷는데, 올 해 처음 피어난 개나리꽃도 보았어요.
봄에 핀 개나리.
새롭고,
새롭지 않아요.
개나리가 피었으니,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봄은 얼마 안 가서 곧 더운 여름이 올 거예요.
그러다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 겨울이 올 거예요.
난 또 그렇게 다시 개나리를 보며 봄을 느끼겠죠.
작년에 합정에서 집까지 몇 번 걸어 봤더니
이제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잘도 도착해요.
나는 이제야 앞을 보며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마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아래를 보며 걸어요.
간혹 마주치는 눈빛들 대부분은
유쾌함 보단 불쾌함에 더 가까운 눈빛이에요.
나에게 머무는 낯선 이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피해요.
수차례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낯선 이들을 보고 멈춰서 귀기울여 준 적도 있었지만요.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가던 길을 벗어나게 하려 방해하려는 목적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나는 알아요. 진짜 도움이 다급한 사람의 상태를..
익숙하지만 친숙해지지 않는 길들을 따라
나는 좀 전까지 이렇게 걸어왔어요.
나는 지금도 이렇게 걷고 있고요.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걸을 거예요.
그러면 난 이렇게 또다시 그곳으로 도착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