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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리아 Nov 15. 2024

절단의 결단

가을에도 새싹을 틔우는 절단의 결단

지금 사는 집에 이사를 와서

가스 연결, 인터넷 설치보다도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식물들을 주문한 일이었다.


집을 계약하고 집청소를 하면서 깨닫게 됐다.

아파트 단지 바로 옆 조용한 주택단지에 위치한 물건을 두고,

6차선 도롯가에 있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실수였단 걸...

-지하철역 1분 컷에 그만 눈이 멀었던 것이었다-


늘 겨울날조차 창문을 열고 살던 내가

살랑이는 봄바람을 뒤로하고

이 집에 이사오자마자 창문부터 닫았던 이유엔

도로의 소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실 바닥만 열 번 넘게 닦았음에도 걸레는 계속 새까맣게 변했고

아무리 청소를 해도 새까만 먼지가 곳곳에서 계속 출몰했다.

-정체를 수소문한 결과 타이어 분진으로 추측됐다.-


집에 공기순환기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첫날 관리인은 전기세폭탄을 맞고 싶지 않으면 작동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백수에게 요금폭탄이란...

그냥 폭탄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지도..

-순환기는 설명서도 없었고, 앞에 쓰인 로고로 인터넷 검색을 해도 아무것도 안 떴다.-

그래서 애당초 공기순환기는 없다 생각하였다.

공기청정기가 필수템이라고들 했지만, 진짜 필요한 구매 리스트가 이미 꽉 차서 낄 틈이 없었다.

-세탁기, 침대, 테이블... 등등-

그래서 식물들을 구입하는 예산을 늘려, 피톤치드에 의지해보기로 했다.

“불과 몇 개의 작은 식물들로도 피톤치드와 공기청정 효과를 볼지어다”라고 주문을 걸면서..


그때 만나게 된 식물 중 하나가 고무나무였는데

옆에 있던 올리브나무, 바질, 유칼립투스, 라벤더.. 등의 수많은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 흙 속에 묻히는 동안에도

속을 썩이는 구석 없이 꿋꿋이 자라면서 내 곁에 있어왔다.


그러던 녀석의 상태가 올해 들어 시원치 않았다.

초반엔 그냥 어쩐지 좀 푸석푸석해진 느낌이었는데

성장을 멈추고 잎만 떨구기 시작하더니

가지들도 빼빼 말라만 가고 어떠한 새싹도 틔우질 못 했다.

무성하던 잎들 조차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마침내 앙상한 기둥만 남기고 마지막 한 장의 잎새만 겨우 남아 있게 되었다.


매일 간신히 숨을 이어가는 나무의 가뿐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온도를 체크하고, 물을 주고, 햇살과 바람을 쐬어주고, 영양이 될 만한 것들을 흙에 묻어 줘 보거나, 벌레를 잡아주고, 분갈이를 하는 것.

여기까지였다.

내가 식물에 기울일 수 있는 최대의 정성은…


이후엔 간간히 물을 주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에고고…” 하며 묻어 줄 생각이었다.

아니, 유독 나무 타는 냄새를 좋아해서 불을 짚어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서 나는 노산의 연령대에 들어도 반려동물 한 마리 거두질 않고 식물을 키우는가...

아니 식물이 나를 키운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그러던 어느 날,

들여다본 나무는 더 빼빼 말라 있었고, 잎에는 시퍼런 멍 마저 들어 있었다.

“위태위태하네…어찌저찌 간신히 버티고는 있는 거 같은데… …”


그런데

그 옆에 놓인 식물을 보니

옆에 놓인 식물도 생기가 없었다.

그 옆에 놓인 식물도..

그 옆에 놓인 식물도..

그 앞에 놓인 거울도..

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그런데... 이 녀석이 다른 곳에서 자랐어도… 지금 같았을까?”


지금은 많이 싱싱해진 마지막 잎새


오래전 언젠가 강풀 작가의 워크숍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강풀 작가는 자신의 작품 ‘마녀’를 소개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죽게 되는 마녀와 같은 운명을 가진 주인공 이야기였다.

워크숍이 끝나고 함께 갔던 오래 사귀었던 옛 연인은 내게 말했다.

“혹시 너도 마녀 아니야? … 옆에 있으면 안 좋은 일 당하는... ”


오래전,  동창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왜 매번 너한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때도 늘 그렇듯 웃었다.

어째서 난 늘 그렇게 관계가 단절되어서야 그들이 휘둘렀던 날카로운 말과 행동들에 받았던 상처가 보이는걸까..-


주방으로 가서 빵칼을 꺼내 들었다.

"그냥 이대로는 아니지 않나..."


-그전에 실톱을 찾으려 잠시 공구상자를 뒤졌다. 하지만 전에 버렸는지 보이질 않아

비슷한 걸 떠올리다 보니 빵칼이 생각났다. -


나무 기둥에 있는 마디에 칼을 들이대자

“내가 이 아이의 간신히 이어가던 숨통을 끊는 건 아닐까?” 이런 두려운 마음이 들어 칼을 내려놨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하여 이내 다시 칼을 잡았다.


쓱싹쓱싹 나무 기둥을 세 토막으로 썰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무를 썰 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하며 배짱 좋은 척했지만

막상 하얀 피를 흘리는 나무를 보니 또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뒤늦게 핸드폰을 들어 검색을 했다.

고무액이 흐르는 상처 난 부분의 뒤처리를 잘해주지 않으면 병균에 감염되어 죽을 수 있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고무액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고무나무의 상처부위를 잘 닦아주고

흙에 다시 묻은 다음, 물을 주고, 햇살 좋은 창가에 놓아주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다시 간간히 물을 주면서 지켜보는 것일 뿐…


그렇게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보았는데

며칠이 흘러도 악화되는 기색 없이 마지막 잎새도 떨어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 잎새조차 없이 기둥만 잘려 심어진 거무죽죽 빼빼 말랐던 나무 기둥들도  

어쩐지 전보다 살이 차오르고 낯빛도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또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기둥 곳곳에서 작고 뾰족뾰족한 푸른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 현재 그 파란 새싹들은 점점 기지개를 켜고 여린 잎으로 자라나고 있는 중이다.


뾰족뾰족 초록초록


새싹이 돋아난 걸 보고 나서야

이제야 나도 마이너스의 손에서 마이더스의 손이 된 느낌이 들었다.


절단의 결단은 가을에도 새싹을 부를 만큼 강력한 것이었구나 싶다.

만약에 그날 내가 단절이 두려워, 칼을 빼드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절단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단절의 시간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내 눈앞엔 푸릇푸릇한 새싹 아닌 고무나무의 무덤이 있었을까?

적절한 긍정적인 가설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 잎새가 매달려 달랑달랑 거리는 삐쩍 마른 나뭇가지와

그 현상유지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

이것이 그나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밝은 예후다.


늘 생각한다.

매연과 층간소음에서 벗어나 공기 좋고, 이웃 좋은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비실한 몸상태도 부족한 지식과 테크닉도 보강하여 경제활동도 활발히 해서

잡념 없이 잠들고 잠에서 깨고, 걱정 없이 싱싱한 과일, 야채 맘껏 먹으며, 수심 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며 살고 싶다고..


칼도 수시로 빼든다.

양파도 썰고, 두부도 썰고, 택배박스테이프도 두 동강 낸다.

생각해 보니, 칼보단 가위를 더 자주 잡는다.

얇고 물렁한 것들, 뜯어지지 않는 포장봉지, 끌러지지 않는 끈들은 가위로 자른다.


끊어내고 잘라내고 버리고.. 그렇게 절단시킬 구체적인 무언가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냉장고를 뒤지고, 옷장을 뒤지고, 책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져 비워낼 무언갈 찾곤 한다.

집안을 뒤졌는데도 딱히 찾지 못했다면 오프라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 본다.

휴대폰을 본다. 주소록도 보고, SNS팔로워 팔로우도 보고, 친구도 아닌데 친구목록에 뜬 친구들도 들여다 보고.. 오늘처럼 제대로 키보드워리어가 되어 시시콜콜 별별 이야기 적은 글들도 보고…

그러다 보면 “가입해서 회원 정보만 제공한 사이트들 탈퇴해야 되는데 하는데..”이런 생각도 든다.

그러다 또 포털사이트를 접속하여 뉴스 헤드라이너를 읽게 되면, “도대체 이 나라와의 연은 어떻게 끊어내지?” 하고, 해외 시민권 딴 사람들의 글과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 지루해질 때면, 때 마침 알고리즘이 불필요한 인간관계 정리하기, 끊어내야 할 안 좋은 식습관.. 등등 이 띄워준다.

-속 마음도 읽어주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AI...-


며칠 전부턴 커피도 끊고,

몇 달 전부턴 탄산수와 술도 마시질 않고 있다.

고기를 끊고 냉동식품들도 베지테리안 전용 식품으로 바꾼 지도 꽤 됐다.

물론 예전처럼 페스코베지테리언을 선언하며 철저히 지키려 하건 아니지만 일부러 고기를 사 먹진 않는다.

-채소랑 과일은 끊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고물가 때문에 수급 부족으로 자동적으로 끊기게 됐다.-

계속 아까워서 묵혀두었던 옷들도 20킬로 넘게 꺼내 팔고

오래오래 카드지갑에만 끼워두었던 안 쓰던 회원카드들도 폐기했다.

올해 초엔 전화번호도 바꿔 전화번호 목록, 메신저 목록도 비웠다.

인스타 개인 계정의 팔로워도 다 끊어내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하고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올리던 수백 컷의 그림들도 다 밀어버렸다.

노트북과 외장하드까지 비울 생각은 없었는데 작년 말과 올해 초에 차례로 자동으로 다 깨끗이 날아갔다.

그래서 그걸 시작으로 올해 이것저것 칼을 빼들고 끊어내고 비워내자 싶었다.

하지만 비울 것들은 여전히 눈에 띈다. 안 쓰는 고장 난 핸드폰, 안 쓰는 케이블, 카메라 등등등...


사실 정리 해야 할 대상 중에 그 자체에 큰 하자가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되려 다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더 크다. 언젠가 어디엔가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웅켜쥐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걸 움켜쥐기에 내 주먹은 너무 작고

끌어안고 있기엔 내 품이 너무 좁다.

-엔비디아의 1억짜리 GPU칩이 손에 들어왔어도 나는 알아보지 못하고 정리할 생각에 골머리를 싸매지 않았을까?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아니 있었어도 나는 알아내지 못 했을테지만..-


나쁜건 그 자체로 독이지만

내 손에 좋은것도 중독이 되어버리고

그 사이에 끼지 못하는 애매모호한건 자리잡을 틈이 없어 삐걱삐걱거리다 결국 정리대상으로 지목된다.


정리 대상이 그나마 인간이라면 상처받은 기억이라도 떠올리면 되지만, 사물은 늘 할 일 없이 늘 가만히 조용히 있는 존재인 거라... 그런 그들에게서 무슨 억한 심정 떠올려 쓰레기통에 담겠는가?

그래서 정리는 늘 미뤄지고 더 어려워진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칼질은 매번 핵심을 찌르지 못한 채 그렇게 에너지 소진으로 끝이 난다.


따라서

아무리 칼자루를 휘두른들, 수만 번 저것들을 잘라낸다 한들 내 삶의 무게가 줄어들 리가 없다.


하지만 도대체 어딜 무엇으로 자르고 어디에 새로 심어 어디에 갖다 두어야

이 메말라가는 시간을 멈추고 새싹을 틔울 수 있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어제는 노래를 만들고, 엊그제는 영화를 봤다.

엊그제 보았던 영화는 전부터 보려고 벼루어 왔던 '존윅'시리즈.


영화내용은

한때 가장 잘 나갔던 은퇴한 킬러인 존윅 이야기다.

주인공 존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실연에 빠져 최고의 킬러 자리에서 내려와 반려견에 의지하며 조용히 침잠하며 사는 중이었다.

그러나 빌런들이 그런 나약한 인간들 가만둘 리 없다.

그들 눈에 약자는 그저 탈탈 털기 좋은 찬스템인 것을..

그렇게 그들은 주인공을 그저 이빨 빠진 늙다리 개로 보고 겁 없이 덮친다.

그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반려견 마저 죽여버린다

존윅인 줄 알았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존윅을 둘러싼 사람들 재산 등을 하나둘씩 없애버린다.-

반려견을 하늘로 떠나보낸 존윅은 복수를 위해 다시 킬러계로 복귀한다.


주인공은 빌런의 정체를 쉽게 알아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에게 존윅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할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 빌런의 아버지는 뉴욕을 주름잡는 조폭계 대부다.

빌런들도 곧바로 그들이 건든 상대가 존윅이란 걸 눈 채면서

계속해서 주인공에게 첩자도 보내고, 힘쓰는 놈들로 꽁꽁 무장하여 바리케이드도 친다.


그렇게 주인공은 장애물들을 제거해 나가면서 제거 대상 빌런들에 접근하여 맞짱 뜨는 이야기다.


총, 칼, 주먹.. 무기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휘두르지만 무고한 시민을 건들지 않고 빌런들만 명중해단숨에 제압해 나가는 키아누리브스(주인공 존윅 역할의 배우이름)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켠에 뭉쳐있던 답답함도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 내게도 방해받는 것들을 저래 단숨에 제압하여 깔끔히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사실은 애초부터 나도 명확한 답이 없단 답을 알면서도

그저 내가 가진 이 무딘 칼이 창피해서, 너무 많은 시행착오가 예상돼서, 견뎌야 할 상처가 두려워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향해 빼 들을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아니면 사실 내게 진짜 필요한 건 칼보단 또 다른 그릇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나도 이렇게 다 치우고 지우고 자르고 제거해 나가다 보면

제거대상의 근본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번주에도 칼을 뽑아 드는 대신, 20인치의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하나를 샀다.

가볍게 짐을 꾸리면, 이 메말라가는 시간을 단절시킬 용기를 내기 좀 더 쉽지 않을까?

그렇게 새싹을 틔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아직 티켓조차 끊지 않았지만 말이다.


- * 날렵한 몸짓과 매서운 눈빛으로 탕탕탕 총을 쏘아대단 존윅 주인공역을 맡은 키아누리브스도 ,

SNS에선 묵직한 움직임과 무딘 눈빛으로 베이스를 둥가둥가 치고 있더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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