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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 May 02. 2024

[서울의지형도] 계획을 일탈하는 자생력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379호 기고

Korea Mational University of Arts News

서울의 지형도 Topography of Seoul 정기연재


3 계획을 일탈하는 자생력


청량리역은 서울 안과 밖으로 뻗어나가는 열차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 열차가 교차하는 큰 정거 지점으로 광복 이 후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 중에서도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사람들이 거치게 되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현재의 청량리는 역사에서 나와 지상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면 오른편으로는 디자이너스 호텔이 보이고, 왼편으로 조금 더 나 아가면 경동시장의 초입으로 이어진다. 기차역과 이어진 건물 안으로는 롯데백화점, 롯데마트와 함께 한때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했던 장난감 몰인 토이저러스가 들어서 있다. 20층 가량의 백화점, 영화관, 장난감 몰, 이들은 그 이름만 반짝이고 더는 활발히 이용되지 않는다. 종종 청량리역사와 이어진 건물 안에 있는 롯데시네마로 영화를 보러 갈 때가 있는데, 밤 영화가 끝난 어두운 시간, 건물 밖으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희미한 안내등만 켜져있는 건물의 층계를 바라보면 이곳의 생명력이 다해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남아있는 공간 위로 지난 시간과 사람들이 활발히 오갔을 곳곳의 장소들을 상상해본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기에 장난감 몰이 들어서고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생계 유지 이상의 생활이 이루어지며 백화점과 영화관이 생겼을 거다. 


역사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기동, 용두동, 청량리동, 전농동 일대가 조금씩 한산하고 조용해진다. 이들은 강북·강동 지역에 몇 남아있는 재개발 예정 구역으로 곧 사라지게 될 동네들이다. 기차역과 멀티플렉스, 대형 체인 백화점, 거대 전통시장이 모두 한곳에 모여있는 규모에도 불구하고 청량리지구는 거대 자본이 진입하던 시기에 성장의 기세를 왜 끌고 가지 못한 걸까? 청량리는 조선시대 때부터 도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사람들이 머물거나 거쳐 가는 경계선의 거점이었다. 전차의 첫 번째 노선을 점하며 더더욱 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하게 된 청량리는 서울 옆 부도심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그 이후에는 서울과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을 잇는 철도망의 열차와 지하철 1호선을 확보하면서 자신의 역사 지리적 위상을 이어왔다. 서울, 경성의 면적이 지금보다 좁았던 때에 청량리는 서울에 속해있지 않았다. 청량리의 서울 편입은 1910년대부터 약 30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에서 관할구 주소지를 거듭 수정하며 이내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이 되었다. 점차 확장되는 서울의 경계와 함께 외곽에서 부도심으로, 부도심에서 서울 동부권의 새로운 소비문화의 장으로, 그리고 도심 주변부의 근대도시 주거지로, 청량리 일대는 자신의 역할과 가능성을 가지고 서울과 자신의 연대기를 엮어왔다. 


그러나 청량리는 계획된 도시가 아니었다. 청량리는 교통의 거점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삼아 자생적으로 발전한 동네와 지역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러 서울의 외곽 지역에서 몰려온 몇몇 사람들이 청량리역 근방 길가에 조그마한 노점을 차려 고향에서 생산하고 채취한 농산물과 약재를 가져와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작은 노점상을 시작으로 점차 많은 사람이 모여 자연스럽게 시장의 형태가 이루어졌다. 상권의 형성 흐름을 따라 서민들이 모여 주거지를 형성하고, 이 규모가 얼마간 자리잡히자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 청량리지구는 철도부설과 함께 토지구획정리사업의 대상지가 되어 정부 차원에서 이 일대에 주택을 공급하면서 서울의 주요 정책과 도시계획 사항에 따라 정책을 펼치는 등 근대도시 계발 계획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지난 100년 동안 청량리 위로 다양한 정책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도시 한옥 주거지, 부흥주택, 시민아파트, 재래화시장의 현대화 사업 …... 시민아파트부터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아파트 단지까지 여러 계층을 아우르는 건축과 토지 계획이 들어섰으며, 여러 형태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혼성적 특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청량리 일대의 도시적이면서도 교외 같은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서울의 발전을 따라가지만 이를 위한 작은 실험체에 불과하기도 한 곳. 청량리가 서울 에 편입되었음을 말해주는 여러 자료와 흔적은 이들의 발전 가능성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청량리 지역 에 “성장의 기세”가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그런 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청량리 일대의 발전사를 달리 바라볼 때 교통의 거점이란 도성 내에 진입하지 못한 이농민들이 거주하게 된 변두리의 길목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청량리에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말마따나 이 지역이 서울 중심지의 실험 대상체로 요구되었다는 것과도 같다.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서울은 그런 도시다. 청량리같이 변두리에 위치한 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심은 중심부대로 자신의 자생력을 토대로 지역을 유지하기에 난항을 겪는다. 서울의 모든 것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모든 것들은 부유하는 듯 정착되지 못한다. 서울 도시는 이들이 자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지 않고 임시적인 청사진만 서울을 둥둥 떠다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청사진이 그리는 바는 막연한 발전이다. 중심은 더욱 중심으로, 외곽은 중심을 위한 것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은 곧 사라질 예정을 품은 임시의 장소가 된다. 서울의 발전을 따라가지만, 이를 위한 작은 실험체로 대리되기도 하는 곳. 이는 모두에게 구속이자 배제이고, 청량 리(혹은 그 모두)를 정착이자 일탈의 장으로 만든다. 


그런 청량리를 계속 유지시키는 힘은 첫 시작과 같을지 모른다. 생명력이 다해가는 동네라 일별했지만, 이들의 자생 력까지 그렇게 쉽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집단이든, 중심을 향해 들어온 집단이든, 일단 이들은 이 일대에 무리를 형성했고, 이를 유지해 오고 있다. 청량리는 스스로 자라 나왔다. 서울에서 가장 큰 청과물 시장 뿐 아니라 경동시장, 서울 약령시까지 세 큰 규모의 시장(이하 경동시장)이 이곳에 모여 지역경제의 순환을 유지해 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시장법에 따르면 시장의 형태는 상가 건물형 시장, 노점형 시장, 장옥형 시장, 상가주택복합형 시장, 크게 네 가지로 나뉘는데, 청량리 일대 시장은 노점상과 큰 규모의 시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장터의 풍경을 보여준다. 도심에 민간 개발자를 통해 상가 형태의 시장이 나타나고 시장상인회를 중심으로 점포가 형성되었을 때, 종종 상인회에 들지 않은 노점에게는 상가시장의 점포들이 배타적으로 나오는 상황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작은 골목의 노점으로부터 자신들의 규모를 확장해온 경동시장은 노점과의 상생에 너그러운 편이다. 시장의 풍경은 노점과 도매·소매상의 상생 관계에서 더 나아가기도 한다. 1920년대부터 한국전쟁 후 60년대까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함께 집단적으로 한옥형 주거지가 건설되었는데, 그중 한 사례가 도시한옥 단지다. 경동시장 근처의 도시한옥은 주로 196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주택난에 따라 급조된 건물인만큼 내부 설계는 열약하게 건축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에는 도시 한옥의 용도가 변경되어 주변 시장의 지원시설물로 성격이 바뀌었고, 시장과 면해서는 소매상, 식당, 창고, 혹은 내부 마당을 냉장고로 활용하는 경우로도 사용되며 시장 주변의 도시 한옥을, 시장을 지원해주는 배후지로 삼아 관계하고 있다. 


예정을 비껴나가는 곳, 계획을 벗어난 그림이 확장되는 시간이 청량리를 거쳐왔다. 혹은 청량리가 그 시간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결과을 만들어냈다. 서울의 실험장으로 치부된 부지가 여러 번의 시도와 실험을 거쳐올 때,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관계를 만들고 상생을 도모하며 지역을 지속해온 시간은 이들의 자생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애초에 실험의 청사진이 향하는 바는 '의미없는 나음'이기에 자신이 뜻하는 바와 무관하게 이는 그저 다시 한번 사라지고 새로운 정책으로 덧씌워질 반복 속 작은 텀일까. 경동시장의 4번 출입구 바로 안쪽으로 들어가면 29년간 폐극장으로 방치되었던 경동극장이 스타벅스 경동1960점으로 뒤바뀌어 재탄생한 것을 볼 수 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스타벅스는 기존 극장의 모습은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내부를 재건축했으며, 주문 번호를 부르는 대신 상영기를 통해 주문 번호 크레딧을 올리는 호출 방식, 기존의 영사실을 파트너 휴식 공간으로 만드는 등, 경동시장 그리고 청량리 일대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경동1960점이 개장한 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경동시장을 찾아오고 있다고 하며, 지역 상인들도 시장이 활성화되는 요새의 변화를 반긴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생명은 사람 수의 증가가 전부가 아니다. 열차, 지하철, 주택공급, 백화점과 교육시설의 건설, 사람의 수를 타겟 삼은 사례는 여태까지도 있었다. 경동극장의 변화 중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건축물의 재사용 시도에서 서울에 하나 남아있었던 단관극장인 경동 극장에 대한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공간은 남았지만, 이들이 공간에 함께 가져온 것은 LG 금성사의 발전사와 최신 가전 기구, 스타벅스가 현 지역 아티스트와 만들어가는 공생관계들로 청량리 일대, 경동시장과 경동극장처럼 땅에 발붙인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더 나은 것을 향한 청사진도 분명 필요하나, 임시적인 청사진만을 가져와서는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들의 자생력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정착되는 것으로 여기는 상상이 필요하다. 청사진을 앞뒤로 일탈과 전진을 멈추지 않는 것.


1고 2024.04.09

1.5고 2024.05.01


http://news.karts.ac.kr/?p=1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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