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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주 Jul 13. 2020

싸움의 방식

한 인간을 작은 역사 단위로 환원하면, 그 안에는 크고 작은 개별 사건과 이를 종합해 형성되는 하나의 인격 내지는 품성이 있다. 개별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평가할 것인지 그의 품성을 두고 평가할 것인지는 오롯이 평가하는 사람의 관점에 달렸기에 평가 내용은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몇몇 개별 사건들에 드리워진 어둠을 조명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으로만 점철되지 않은 한 존재의 밝은 면을 존중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평가 내용의 첨예한 대립이 아니라 평가자의 관점에 대한 고찰이다. 달리 말해, 평가자 본인의 본인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평가 행위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고 우선하여 다뤄져야 할 비판적 행위일 수 있다.


특히 자신의 말과 글, 행동이 해석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이라면, 기술된 결과물 자체보다 그렇게 기술되게끔 한 자신의 관점과 의도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더욱이 언론에 먹잇감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아도취형 정치인과 대척점에 서기를 스스로 기대하는 정치인일수록 정치적 행위에 앞서 반성적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경솔함과 무례함은 사안의 복잡성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직관과 감수성에 의존한 채 문제를 서둘러 다루고자 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되곤 하는데 이러한 지극히 자기의존적인 관점은 정치인으로서의 확장성을 제한할 뿐 아니라 때때로 확증 편향에 빠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정치 경험이 이러한 식으로 흘러가게 되면, 대중과 척을 지는 일이 많아지고, 어느 순간 대중의 반감을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표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종의 ‘지식인병’을 앓으며 정치 여정을 고독하게 마무리할 공산이 크다.  


나는 정의에 가치를 둔 정치인이, 특히나 소수자의 인권에 주목하는 정치인이 이러한 지식인병을 앓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가치가, 이유 불문하고, 다른 어떤 사안과 가치보다 먼저 다뤄져야 한다는 자기 확신과 압박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 필요하다면, 대중과 척을 지는 소신이 있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필요한 때, 투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소수가 소수를 대변하는 방식이 언제나 다수를 향한 격렬한 투쟁일 필요는 없다. 강박증처럼 내재화된 때를 가리지 않는 ‘싸움’의 방식은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이에겐 괜한 시비처럼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럴 때일수록 잊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 시도 때도 없이 훈계하는 이른바 눈치 없는 ‘꼰대질’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몰라서’ ‘지금’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삶의 결이란 그만큼 복잡한 것이다. 여러 가치와 감정과 기억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때는, 평가하고, 다그치고, 또 다른 말을 낳는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잠시 침묵하면서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감정을 표출하거나 애착 관계를 해소하는지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을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비로소 사태의 본질로부터 삐져나오는 잘못된 또는 악의적인 곁가지를 단호히 쳐내도 늦은 건 아닐 테니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들이 기꺼이 걸어온 싸움의 방식이 한편으론 애석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Background-image from: The Milliner’s Workshop (1926) by Pablo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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