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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주 Sep 29. 2021

거짓말, 상상, 그리고 혐오

아프간 여성 난민 2,000여 명 임신 관련 국내 언론 보도 분석

다음은 언론사 <서울경제>가 네이버 뉴스포털에 주요 기사로 직접 선정한 9월 26일 자 아프간 난민 여성과 관련한 기사의 헤드라인과 주요 내용 중 일부이다.


장유하, “한달새 2,000명 임신···아프간 난민 체류 미군기 지 현 상황,” 「서울경제」, 2021년 9월 26일
유럽 최대 미군 기지인 독일 공군기지에 머무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난민 2,000여 명이 새로 임신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24일(현지시간) CNN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현재 1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수용돼 있다”며 “최근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공군기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곳에 임시 체류 중인 여성 3,000명 중 약 3분의 2가 임신 중”이라면서 “더 많은 의료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해당 기사는 비록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다분히 아프가니스탄 여성 난민 다수가 공군기지에서 성행위를 통해 임신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실제로 관련 기사의 네이버 댓글은 이와 같은 인상을 토대로 난민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앞선 9월 26일 자 <서울경제> 기사의 네이버 포털 내 상위 댓글 일부


그렇다면 인용된 9월 24일 자 CNN 원문(“Situation becmoing ‘dire’ at US airbase in Germany housing approximately 2,000 pregnant Afghan refugees”) 내용은 어떨까? ‘임신(pregnant)’과 관련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lready 22 babies have been born to Afghan mothers at Ramstein, and that number will rise very soon with roughly two thirds of the 3,000 women being housed there pregnant, requiring the time and effort of medical personnel from Ramstein and other bases, two US sources familiar with the situation at the base told CNN.


요약하자면 22명이었던 아이의 수가, 3,000명의 여성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여성이 임신한 상태이기 때문에 곧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기지 내에서 성행위를 통해 임신하게 되었다는 인상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곳[공군기지]에 머무르는 3,000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대략 2,000명의] 임신한 여성’(“two thirds of the 3,000 women being housed there pregnant”)이 강조될 뿐이다. 실제로 CNN 기사의 전체 내용은 이처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처한 열악한 수용 기지 환경을 고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표면적인 원인은 우선 잘못된 용어를 사용해 원문 내용을 옮겼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건 “새로”라는 표현으로 <서울경제> 기사에서는 해당 표현이 “임신”을 수식함으로써 마치 아프간 여성들이 수용 기지 내에서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한 것처럼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CNN 본문에는 “새로”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을뿐더러, 굳이 표현해야 했다면, 새로 ‘임신을 한 것’이 아닌, ‘아이의 수’가 새롭게 증가했다는 의미가 전달되도록 표현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근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라는 공군 기지 관계자의 말을 기자가 인용한 점을 보면, 더는 ‘말’이 아닌, ‘사실’ 관계가 문제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곧 기자는 2,000여 명에 달하는 아프간 난민 여성들이 공군 기지 내에서 임신했다는 관계자의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앞서 “새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셈이다. 


다시 CNN 보도를 보자. 공군 기지 관계자의 말은 사실일까? 당혹스럽지만, 22명의 아기가 Ramstein 공군 기지 내에서 태어났다(“Already 22 babies have been born to Afghan mothers at Ramstein”)는 내용을 제외하곤 그 어느 곳에서도 “최근 한 달 새”라는 시간 특정과 “2,000여 명이 [기지 내에서] 임신”했다는 관계자의 발언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인용문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기도 전에 인용 자체가 사실이 아닌 셈이다. 


— 참고로 9월 27일 CNN에서 1차 보도 내용과 헤드라인을 일부 수정했다. 정정된 내용에 따르면 기지 내 임산부 수는 2,000여 명이 아닌, 대략 200여 명이다(“CORRECTION: An earlier version of this story misstated the number of pregnant Afghan women currently at Ramstein Air Base. It is approximately 200.”). 더불어 잘못된 번역의 원문 “two thirds of the 3,000 women being housed there pregnant”도 “hundreds more pregnant women at the base”로 임산부의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도록 간결해졌고, 잘못 세어진 ‘2,000여 명’의 숫자의 경우, 지난 8월부터 Ramstein 공군 기지를 거쳐 간 35,000여 명의 전체 난민 중 임신한 여성의 수였음을 추가로 밝혔다(“An estimated 2,000 pregnant Afghan women have come through Ramstein Air Base out of the 35,000 total people who have processed through or remain at the facility since late-August, according to Lt. Col. William Powell, spokesman for the 86th Airlift Wing.”). 어쩌면 국내 기자들이 또는 ‘어떤 한’ 기자가 — 왜냐하면 이른바 기사 ‘베껴쓰기’가 충분히 의심되는 정황이므로 — 수정 전 문장(“two thirds of the 3,000 women being housed there pregnant”)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한국어로 직역하는 과정에서 “there preganat”를 “그곳에서 임신한”으로 오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됐든 정확한 사실 내용을 전달하지 않은 건 기자와 언론사의 책임이다. 


9월 27일 수정된 CNN 기사 일부


<서울경제> 외에도 많은 언론사가 첫 보도 당시 동일한 오류를 범했으며 일부는 9월 27일 CNN의 보도 정정  이후에도 해당 기사를 수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CNN의 정정 보도 이전에도 충분히 정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앞서 지적한 ‘새롭게’ 임신했다는 표현을 삭제하고, ‘임신 중’, ‘임산부’ 내지는 [증가한] 임산부 또는 [증가할] 아이의 ‘수’에 주목할 수 있게끔 내용을 다듬는 것이다. 정정 내용에 관한 안내 또는 사과 없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은근슬쩍 내용을 수정해 놓은 점이 괘씸하지만, 앞선 <서울경제> 기사를 포함 몇몇 기사들은 9월 28일 자정 기준, ‘임신 중’이라는 표현으로 본문 내용을 수정하였다. 다만, CNN이 정정한 사실 내용에 해당하는 임산부 ‘수’(2,000 → 200여 명)와 관련해서는 보도 내용이 여전히 정정되지 않고 있다. 


9월 27일 자 수정된 <서울경제> 기사 헤드라인, 부제목 및 내용 일부

9월 28일 자정 기준, 보도 내용이 정정되지 않은 몇몇 언론 기사들 내용

CNN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1만 명의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는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새 생명이 탄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에서 피난민을 돌보는 공군기지 관계자는 “아프간 어머니에게서 22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신생아의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이곳에 임시 체류 중인 여성 3000명 중 약 3분의 2가 임신 중”이라면서 “더 많은 의료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송현서, “한 달 새 2000명 임신·22명 출산…아프간 난민 체류 미군기지, 현 상황”, 「서울경제」, 2021년 9월 25일.)
유럽 최대 미군 기지인 독일 공군기지에 머무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난민 2,000여 명이 새로 임신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습니다. 현지 시간 24일 CNN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현재 아프간 난민 1만 명이 수용돼있다"며 "최근 한 달 사이 여성 약 2,000명이 임신하고 아기 22명이 태어났다"는 공군기지 관계자 말을 전했습니다. (디지털뉴스부, “독일 미군기지 머무는 아프간 난민, 한 달 사이 2,000명 임신”, 「MBN」, 9월 27일.)
유럽 최대 미군 기지인 독일 공군기지에 머무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여성 중 한달 새 2000명이 새로 임신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CNN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는 현재 1만 명의 아프간 난민을 수용돼 있다고 한다. 현지에서 피난민을 돌보는 한 공군기지 관계자는 최근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매체에 설명했다. (신은정, “‘2000명이 임신했다’ 아프간 난민 체류지 심각한 상황”, 「국민일보」,9월 26일.)
유럽 최대의 미군 기지인 독일 공군기지에서 아프가니스탄 난민 여성 2000여 명이 새로 임신하는 등 난민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제반 시설이 부족해 수용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24일(현지시간) CNN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현재 1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수용돼 있다"며 "최근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공군기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지희, “아프간 난민女 2000명 임신…미군기지 난감”, 「데일리안」,9월 27일.)
유럽 최대 미군 기지인 독일 공군기지에 머무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난민 2000여명이 임신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24일(현지시간) CNN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현재 1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수용돼 있다”며 “최근 한 달 새 약 2000명의 여성이 임신하고, 22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공군기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민성기, “아프간 난민 한달새 2000명 임신…獨 미군기지 난감”, 「헤럴드경제」, 9월 27일.)


우리가 분개해야 할 점은 기자라는 직업군으로서의 자질이 있든 없든, 또는 언론사별로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거짓된 상상력을 자극해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사회적 약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최초의 보도가 난잡하기 짝이 없는 저급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까지, 그래서 저 무기력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온갖 조롱과 혐오의 말에 노출되기까지 언론과 기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단순한 무책임함을 넘어 비겁하고 악랄하다. — 언론의 자정 능력을 기대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우리 일반 대중 또한 저들이 던져주는 거짓에 올라타 상상으로 남은 이야기를 채우고, 이를 방패 삼아 누군가를 향한 혐오의 감정을 표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더 나쁜 기사들, 이를테면 거짓을 말하지 않고도 대중의 상상만으로 거짓을 믿게 만드는 교활하고 악의적인 기사를 걸러낼 힘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출처: 

배경 이미지: Rob Schmitz/NPR. url: https://www.npr.org/2021/09/02/1030307280/afghan-refugees-airlift-ramstein-air-base-germany?t=1632853917024

Liebermann, Oren and Kaufman, Elie, “Situation becoming 'dire' at US airbase in Germany housing approximately 2,000 pregnant Afghan refugees,” CNN, September 24 (updated in September 27), 2021. url: https://edition.cnn.com/2021/09/24/politics/ramstein-airbase-afghan-refugees/index.html

장유하, “한달새 2,000명 임신···아프간 난민 체류 미군기 지 현 상황,” 「서울경제」, 2021년 9월 26일 (9월 27일 수정). url: https://n.news.naver.com/article/011/0003966006

송현서, “한 달 새 2000명 임신·22명 출산…아프간 난민 체류 미군기지, 현 상황,” 「서울신문」, 2021년 9월 25일 (9월 27일 수정). url: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218112 

디지털뉴스부, “독일 미군기지 머무는 아프간 난민, 한 달 사이 2,000명 임신,” 「MBN」, 2021년 9월 27일. url: https://www.mbn.co.kr/news/world/4603903 

신은정, “‘2000명이 임신했다’ 아프간 난민 체류지 심각한 상황,” 「국민일보」, 9월 26일. url: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301394&code=61131111&cp=nv

이지희, “아프간 난민女 2000명 임신…미군기지 난감,” 「데일리안」, 2021년 9월 27일. url: https://www.dailian.co.kr/news/view/1035878/?sc=Naver

민성기, “아프간 난민 한달새 2000명 임신…獨 미군기지 난감,” 「헤럴드경제」, 9월 27일. url: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1092700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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