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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작가 역사트레킹 Nov 04. 2019

서울의 흰 호랑이 인왕산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




2천년 문화도시 서울! 역사트레킹은 그런 서울의 명소들을 자신의 두 발로 탐방하는 고급(?)진 아웃도어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역사트레킹을 떠날 때는 항상 설렌다. 오늘은 무엇을 탐방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역사트레킹을 행하며 나누었던 이야기와 생각들을 이 공간에 담아보았다. 


필자를 비롯한 탐방자들의 발걸음이 계속되는 한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들은 계속 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발자국이다. 경복궁 옆에서 시원스럽게 암반면을 노출하고 있는 인왕산으로 가본다. 서울의 흰 호랑이 인왕산.    





* 인왕산성곽길






●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 탐방할 인왕산은 서울의 우백호이다. 서울의 흰 호랑이가 인왕산이라는 것이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유'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 사직단







●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수성동계곡







●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수성동 계곡    

 

인왕산 성곽길을 걸은 후 다음 탐방지인 수성동 계곡으로 향해간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입구 찾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코스에 들어서면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작은 오솔길로 이어지고 휴식공간도 충분해서 모두 다 만족해했다.      


“서울에도 출렁다리가 있는 거 아세요?”

“어디요? 서울 어디요?”

“짜잔 바로 여기요!”     


그렇다. 서울에도 출렁다리가 있다. 바로 인왕산에. 인왕산 출렁다리는 ‘가온다리’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을 건널 때 항상 이런 멘트를 했었다.     


“트위스트 한 번 추고 가시죠! 앗싸!”


출렁다리에서 트위스트를 땡긴 후 또 이동을 하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성곽길, 수성동계곡, 흔들다리,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국사당, 사직단,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가온다리: 인왕산에 있는 출렁다리. 봄꽃이 만개를 했을 때 찍었다. 가을에도 가면 좋다. 







● 역사트레킹과 함께 건강한 삶을!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필자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딱’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 성곽길 ▶ 수성동계곡 ▶ 출렁다리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창의문 탐방을 마친 후 윤동주문학관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함. 이곳에서 다시 경복궁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함.

5. 참고: 본문에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인근에 있는 선바위와 국사당도 함께 탐방해보면 좋다.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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