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스페인 22편> 펠리페 2세
* 마드리드왕궁(Palacio Real de Madrid): 이전에 있던 건물을 18세기에 다시 지었다. 이때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참조하여 바로크 양식으로 짓게 된다.
<재미난 스페인 22편> 펠리페 2세
가톨릭을 수호하며, 최전성기를 이끈 펠리페 2세
지금은 경남 창원시로 통합된, 진해에 가면 웅천왜성이 있다. 왜성(倭城)? 왜구들이 만든 성인가? 그렇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시작된, 다음 해인 1593년에 일본군에 의해 웅천왜성이 축조된다. 포르투갈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필두로 한 조선군과 의병들, 그리고 명나라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게 된다. 이때 일본군들은 곳곳에 왜성을 쌓아 장기간 농성전을 벌이게 된다.
이 당시 축성된 왜성들은 성벽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겹성 형태를 띠고 있다. 층계를 이루듯 다층으로 성벽을 쌓아 방어력을 증강한 구조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산성들은 거의 한 겹으로만 성벽을 두르고 있다. 험준한 지형 자체가 또 다른 성벽 역할을 하다 보니 한 겹 이상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웅천왜성 앞에 세스페데스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스페인 출신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는 예수회 소속 신부로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서양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웅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청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진해 웅천으로 오게 된다. 이때가 1593년이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년 6개월 간 조선에 머무르며 편지 4통을 쓴다. 일본군의 초청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에 대해 거침없이 기록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가 조일전쟁(1592~1598년)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었을 때 스페인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왕이 그 유명한 펠리페 2세(Felipe II)다. 펠리페 2세는 1556년, 아버지인 카를로스 1세(Carlos I)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카를로스 1세는 합스부르크가 출신으로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다.
* 카를로스 1세: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 5세로 불렸다. 출처 위키커먼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 5세(Karl V)로 불렸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등... 카를로스 1세는 전 유럽을 아우를 정도로 대제국을 건설했다. 실제로 그는 전 유럽을 통합하는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스려야 할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따른 복잡한 문제들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의 통치 기간에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 같은 외적과의 싸움도 발발했고, 스페인에서 일어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과 독일 지방의 농민 반란 같은 내부적인 싸움도 일어났다. 또한 당시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신·구교 간의 갈등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잠깐 스페인에서 발생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을 살펴보자. 1520년에 일어난 코무네로스 반란은 당시 집권자인 카를로스 1세의 과중한 세금 부담 등에 반대하여 세고비아,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봉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도시에서는 자치조직인 '코무니다드'가 만들어졌는데 그 구성원들을 '코무네로스'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따서 코무네로스 반란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주원인은 세금이었지만 외국에서 태어난 카를로스 1세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반란의 원인 중에 하나였다.
1555년, 루터교를 승인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있었다. 정치에 지쳐갔던 카를로스 1세는 다음해인 1556년에 스페인의 왕위를 펠리페 2세에게 넘기게 된다. 같은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에게로 넘겼다. 살아있는 군주가 자신의 아들과 동생에게 양위를 한 사건이자 하나로 묶여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계열과 신성로마제국 계열로 나뉘게 된 사건이었다.
* 펠리페 2세: 출처 위키커먼스
펠리페 2세는 1556년부터 1598년까지, 무려 42년간 통치하며 스페인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미 아버지 카를로스 1세가 물려준 광대한 영토에다 자신의 치세 기간에 획득한 포르투갈 왕국과 필리핀까지 더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임했다.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공동왕 시기인 1478년에 종교재판소가 세워졌었다. 당시 종교재판소의 주 대상은 거짓으로 개종한 무슬림들이나 유대인들이었지만 신을 모욕한 이들도 잡혀 오기도 했다. 또한 신교도들도 끌려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중죄인들에게는 화형이 선고되는 등 종교재판소는 악명이 높았다. 이런 서슬 퍼런 종교재판소의 활동은 당시 서서히 일어나고 있던 종교개혁과는 확실히 대척점에 서 있었다.
펠리페 2세의 재임 기간에 참 많은 전쟁이 있었다. 워낙 전쟁이 잦다 보니 재정이 고갈될 정도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어 은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전쟁으로 인한 재정 손실은 그보다 더 컸다. 결국 펠리페 2세는 세 번에 걸쳐 파산선언을 하게 된다.
1570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침공한다. 지중해 동쪽에 자리 잡은 키프로스는 크레타와 더불어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섬이었다.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진출은 실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교황은 가톨릭 국가들의 참전을 요청했고, 스페인을 필두로 한 신성동맹이 결성됐다.
* 세르반테스 생가(casa de cervantes): 바야돌리드에 있는 세르반테스 생가. 이곳에서 돈키호테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1571년 10월 경, 그리스 서부에 있는 파트라스 해역에서 신성동맹의 함대와 오스만튀르크의 함대가 맞붙게 된다.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신성동맹군은 오스만튀르크 함대를 대파한다. 53척의 갤리선을 격침하고, 2만여 명을 살상한다. 레판토 해전은 화포 공격으로 승부가 갈린 최초의 해전으로 유명하다.
또한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대문호인 세르반테스가 참전한 전투이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서 왼팔을 다치게 되는데 그 부상으로 평생 왼팔을 못 쓰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평생을 풍운아처럼 살았고, 장애까지 얻게 되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대기만성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1605년, 58세가 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출간했고, 크게 대박이 났다.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인해 일시적이긴 하지만 지중해에서의 오스만튀르크의 위협이 제거된다. 한편 스페인 함대는 레판토 해전의 가장 큰 승리자였다. 교황의 부름을 받아 이교도들을 지중해에서 몰아냈다는 찬사를 전리품으로 챙기게 된다. 16세기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맹위를 떨쳤던,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가 큰 돛을 올린 것이다.
카스티야의 수도는 고정되지 않았다. 왕실의 근거지는 바야돌리드였고, 비공식적으로 도읍지 역할을 한 건 톨레도였다. 이외에도 카스티야 건국 초기에 중심지 역할을 한 동북쪽의 부르고스, 레온 왕국의 중심지인 레온도 카스티야의 핵심 도시들이었다.
* 산타크루즈 성(Palacio de Santa Cruz): 바야돌리드에 있는 산타크루즈 성. 바야돌리드는 왕실의 근거지였다.
왕좌에 오른 후 5년이 지난, 1561년에 펠리페 2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다. 또한 1584년에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궁전을 짓는다. 엘 에스코리알은 궁전이지만 그 안에 대성당과 수도원, 묘지까지 포함된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아버지인 카를로스 1세의 행적과는 다른 모습이다. 워낙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보니 카를로스 1세는 각 나라를 순회하며 통치했다.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로의 수도 이전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꾀하게 된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스페인 앞에 복병이 나타난다. 바로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신교도 국가였는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이끄는 해적들이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는 스페인 상선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심지어 드레이크 함대는 1587년에 카디스항을 공격하여 스페인 함선 30여 척을 불태웠다. 펠리페 2세는 크게 분노하며 영국 측에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당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조롱이나 하듯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130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파병한다. 이때 함대의 출항지는 1580년에 합병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곧바로 영국으로 직행하지 않고, 네덜란드에 있는 3만 명의 육군을 승선시킨 후 합동으로 공격하려고 했다.
* 카디스: 카디스 대성당.
스페인 무적함대는 위풍당당하게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스페인 함대에 승선하지 않았던 것 같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함대에 매복 작전에 걸려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시 영국배들은 스페인배들보다 속도가 더 빠른데다가 함포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함포로 사격을 하고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조일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원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는 것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천신만고 끝에 스페인 함대가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하지만 승선할 예정이었던 육군이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함대는 해안에 무리 지어 정박하게 됐는데 이를 놓칠 영국 함대가 아니었다. 영국 함대는 화공을 펼쳤다. 바람도 스페인 함대에 불리하게 불었다. 이에 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도망가기에 이른다. 브리튼 섬을 한 바퀴 돌아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에 나설 셈이었으나 이번에는 폭풍우에 가로막히게 된다. 영국 함대의 속도전과 폭풍우에 밀려 스페인 함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됐고, 결국 처참한 몰골로 본국으로 귀환하기에 이른다.
이 해전은 칼레(Calais) 인근에서 벌어졌다 하여 칼레 해전이라고 부른다. 칼레는 도버해협에 있는 프랑스의 도시이다. 이 승리를 두고 영국에서는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와의 싸움에서 승전을 이루었다고 만방에 과시하게 된다. 자신들의 승리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정치적 셈법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무적함대’라는 별칭을 스페인 사람들 스스로 붙인 게 아니라 영국에서 조롱의 의미로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 마드리드 솔 광장: 한 여름의 솔 광장.
칼레 해전에서 수모를 당했지만 스페인은 빠르게 함대를 재건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크게 감당하지 못할 패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더군다나 신교측에 서 있던 영국에 일격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뼈 아팠던 것이다. 실제로 펠리페 2세 사후 스페인은 서서히 그 힘을 잃게 된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로 자임했다. 이슬람 이교도들과 싸웠고, 신교파 이단들하고도 대립했다. 한편 예수회를 지원하여 활발한 해외선교에 나서게 했다. 조일전쟁 때 조선을 방문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도 예수회 소속이다. 이런 펠리페 2세의 가톨릭에 대한 수호로 인해 스페인은 유럽 주요 국가들이 겪었던 신·구교도 간의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꼭 좋은 일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폐쇄성이 부메랑이 되어 스페인의 근대화가 가로막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펠리페 2세 시대를 둘러보다 보니 조선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서양인인, 세스페데스 신부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연결된 거 같다.
* 칼레해전 지도: 스페인 무적함대의 이동로 및 격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