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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작인 Feb 12. 2022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

놀 줄 알았지? 놀 줄 알았지... 놀 줄 알았지!


우리나라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어감이 주는 차이가 깊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아 어 까지 안 가고 문장부호만으로도 의미가 확 달라진다.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


과연 나의 '휴직하고 놀 줄 알았지'는 어떤 문장부호를 찍어야 맞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다.

휴식이 필요해서 휴직을 한 것도 있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휴직을 결심한 것도 있었다. 물론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안 좋아진 상태로 2년이나 회사를 계속 다녔었다. 그러다가 못 걸어 다닐 정도로 병이 심해졌느냐, 그런 건 또 아니었다. 그러니까, 딱히 결정적인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자가격리와 아이들이 아픈 때를 제외하고는 휴직자의 생활계획표를 칼같이 지켰다.

아침 6~7시에는 운동 또는 글쓰기

오전 10~12시에는 쇼핑몰 주문처리

오후 1~3시에는 쇼핑몰 소싱 또는 투자 정보 수집과 정리

그리고 3시부터 잠들 때까지는 아이들 육아.

내가 이렇게 규칙적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지켰다.



휴직하고 3~4개월 정도 지나자 내 휴직 소식이 꽤 멀리까지 퍼져나갔는지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 휴직하고 노니까 좋냐.

- 집에서 뭐하고 노냐.

- 나도 너처럼 그렇게 놀아보았으면 좋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휴직하고 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출근을 안 한다 = 논다'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랬다. 세상은 수많은 기업들이 생산활동을 함으로 인해 굴러가며 그 기업을 굴리고 있는 우리 직장인들은 항상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을 안 다니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일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을 굴리는 힘 중에 일부만 직장인 그룹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나만 알뿐 내 주변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작 나는 휴직하고 그렇게 잘 놀지 못했다. 여기서 '논다'함은 정말 말 그대로 쉬거나 흥미를 좇는다는 의미다. 물론 생산활동 같은 건 하지 않고 말이다. 문득 남들은 휴직을 하면 뭘 하고 싶을까 궁금해져 직장에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물었더니 아래와 같은 답들이 나왔다.


- 늘어지게 늦잠자기

-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

- 카페에서 지나다니는 사람 쳐다보기 또는 독서

- 평일 오전 영화 관람

- 여행






대부분 뚜렷한 목적 없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거나 쉬는 것들이다. 나는 휴직을 하자마자 바로 계획했던 일들(ex. 지방 부동산 투자, 쇼핑몰 개시 등등)과 갑자기 들이닥친 일(자가격리, 병간호 등등)을 해내느라 앞서 나열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집에 갇혀 있느라, 아이들에 매여 있느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조급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돌봄을 도와주러 오시는 엄마가 코로나 전 즐겨 가던 일본 여행이 그립다는 말씀을 하셨다. 여건상 일본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근처에 있는 일식집에 가서 맛있는 밥이라도 한 끼 먹자고 했더니,


너 바쁘잖아.


하셨다.





갑자기 머리에 종이 울렸다. 생각해보니 휴직하고 거의 매일같이 아이들을 보러 와주시는 엄마랑 나가서 커피 한 잔 마셔본 기억이 없었다.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젠 좀 놀아봐야겠다 하시며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던 엄마였다. 약 8년 간 누린 자유인의 삶은 내가 출산을 하게 되면서 종결됐다. 휴직하고 집에 있으면서 엄마도 좀 쉬시게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녀야지 생각했었는데 정작 그러지 못했다.



아니 누가 채찍질하면서 당장 뭔가 해내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왜 이렇게 달리느라 난리인가. 운동도, 글쓰기도, 새로운 사업도, 육아도 다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인데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나를 너무 조여왔다. 운동을 며칠 쉬면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에 죄책감이 들었고, 글쓰기를 미루면 일상에서 찾은 글감들이 휘발되어 날아갈까 봐 아쉬워했다. 딱히 돈이 궁한 건 아니었지만 쇼핑몰 사업은 시간을 들일수록 성과가 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스스로를 옥죄었다. 육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부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평일 점심 외식을 해야지, 바빠서 못 다니던 미술전시도 가봐야지, 얼굴 당긴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피부관리도 다녀야지. 나는 어린 시절에 꽤나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눈이 푹 꺼진 채 지친 모습의 아줌마가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결국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남은 게 없더라 하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랑 가까운 여의도에 카이센동을 먹으러 갔다. 예약을 안 받는 집이라 점심시간치곤 조금 이른 11시 20분쯤 식당에 도착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5분만 늦게 왔어도 밀려드는 직장인들 덕분에 웨이팅을 해야 했을 것 같다.





카이센동이라는 음식을 일본 여행 가서는 자주 먹었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별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한 그릇에 35,000원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한 끼 식사로는 좀 비쌌다. 그렇지만 엄마랑 식사하는 내내 같이 여행 갔던 이야기도 하고 요새 운동하는 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듣고 하다 보니 비싼 밥값이 아깝지 않았다. 이렇게 비싸지만 눈도 즐겁고 맛도 있는 카이센동을 바쁘게 후딱 해치우고 가는 직장인들 틈바구니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즐기면서 먹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았다. 여의도에는 금융회사들이 많다 보니 고연봉자들이 많은데, 그렇지만 내가 저 사람들보다 시간은 월등히 많겠지 하하하. 뭐 이런 알 수 없는 우월감이 들었다.



좀 더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하도 게눈 감추듯 밥을 먹고 일어나고 웨이팅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눈치가 보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주변 직장인들이 밥 먹으면서 나누는 업계 이야기들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엄마와의 대화도 점점 집중이 안됐다. 아 왜 몸은 휴직 중인데 정신은 부동산 PF에 가 있는 것인가... 난 휴직 중이야, 난 휴직 중이야, 관심 갖지 마, 관심 갖는대도 달라질 게 없대도? 아무리 스스로를 달래 봐도 소용이 없었다.



적당히 먹고 일어나 식후 커피를 마시러 새로 문을  현대백화점에 갔다. 여의도  현대가  연지는    같은데 엄마나 나나 처음이었다. 도심 속의 숲이 컨셉이라더니 진짜로 최상층에 숲이 있었다. 세상에 건물 안에 숲이라니 조경 비용이 얼마나 들었을까.  식물들은 건물 안에 있어도    있는 것들일까. 요새 유행하는 플랜테리어라는  이런 거구나.





카페 점원들은 다 같이 비슷한 색의 재킷을 맞춰 입고 멋쟁이 모자도 쓰고 있었다. 요새는 유니폼도 이렇게 맞춘 듯 안 맞춘 듯 맞추는 건가. 이런 핫플에 와본지도 오래인지라 요새 다 이런 건지 그냥 여기가 그런 건지 감이 안 왔다. 커피도 대충 내려주는 것 같은데 꽤 맛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멀리 내려다보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가 싶었다.

그래. 휴직했으면 놀기도 좀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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