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뒤통수 뱀파이어 P 씨
2006년 4월 4일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회라는 녀석은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없고, 앞에만 머리카락만 있다고. 그래서 기회라는 녀석이 달려오면, 재빨리 녀석의 앞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어야 기회를 잡는다고 말이다. 녀석 앞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이미 지나간 녀석의 뒤통수가 대머리여서 기회를 잡을 머리카락조차 없게 된다는,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그려지는 이야기이다. 이 녀석이 나를 덮치는 그 순간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생의 찬스라는 게 흔하게 오지 않는 거란 말이다. 찬스가 왔을 때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런 나, 샐러리맨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가엾은 샐러리맨 인생에 그다지 여한이 없다. 어차피 삶의 기로에 서서 죽을까, 말까 막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뱀파이어같이 생긴 녀석이 불쑥 튀어나와 내 목덜미를 물려고 달려드는 것이다. 세차게 반항을 우선 해 본다.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은 최후의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은 심정은 이 녀석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옇고 뾰족한 송곳니가 내 목덜미에 스치는 느낌이 든다. 소름 돋지만 싫지 않은 느낌. 이런 절박한 상황에 ‘이건 어쩌면 내 삶의 마지막 절묘한 찬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아마 나 뿐 일 거다. 레인코트와 중절모, 가죽장갑과 선글라스를 쓴 낯설지 않은 이 녀석이 내 피를 빨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사는 길도 아니고, 죽는 길도 아닌 나만의 천국행 지름길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쯤 반항을 하였을까. 한 10초쯤 되었을까. 아직 목덜미가 아프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 뱀파이어 녀석은 아직 나를 물지 못했다. 내 반항에 힘이 부쳤던 것인지, 정확하게 정맥을 찾아 송곳니를 꽂아야 하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한 세 시간 동안 반항을 한 것처럼 힘이 쪽 빠지는 지경에 다다랐다. 두 팔을 위로 올려 내 등을 덮친 녀석의 머리를 잡아 보려 했지만, 중절모 끝 자락만이 잡힐 듯 말 듯하다. 허우적거리는 손사래 아래로 중절모가 떨어지고, 뱀파이어의 머리를 잡아채기 위해 다시 양팔을 힘껏 뒤로 뻗어 본다. 더듬더듬. 엇! 녀석의 뒤통수가 만져진다. 물론 머리카락은 없다.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의 입 언저리에서 내 목을 떼어내려고 하는 순간, 녀석의 앞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뒤에서 달려든 녀석의 앞 머리채를 잡아 쥐고는 묘하게도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상하다.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의 앞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흔들며 반항해 본다. 한 1.5초쯤 흔들었을까. 이상하게 그가 낯설지 않게 느낀 것은 녀석의 뒤통수를 만졌을 때부터였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 짧은 순간에 옆집 P 씨가 생각난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옆집 P 씨와 부엌 창문 너머로 몇 번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나에게 남다른 눈길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이웃 사랑이던, 동성애적 사랑이던 상관없었다. 나는 옆집 P 씨를 볼 때마다 뒤통수는 대머리고 앞머리만 있는 P 씨의 헤어 스타일에 잔잔한 코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어디 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한 1분 여의 반항에 나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일생일대의 찬스를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턱없이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이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나는 결심했다. 이 기회라는 녀석이 내 앞에서 왔건 내 뒤에서 왔건 어쨌든 나에게 왔으니 잡아야 한다는 것을. 옆집 P 씨의 대머리 뒤통수가 내 일생의 기회를 암시하는 복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때까지 죽을까 말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옆집 P 씨의 앞 머리를 꽉 움켜쥐고 정신을 잃었다.
Cover illustration by ChatGPT... 로 그려 보았으나 앞머리만 있는 대머리 뱀파이어를 그리는게 쉽진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