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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22. 2024

노트북 앞 돌부처

요즘 어떤 것에 진심이신가요?

“엄마는 글 쓰는 게 그렇게 좋아?”


노트북을 앞에 두고 다다다다 타자를 치고 있는 나를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방에서 실컷 놀다 거실에 나와도, 운동을 하다 집에 돌아와도 엄마는 부엌 식탁 앞 돌부처처럼 앉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접착제로 엉덩이와 식탁 의자를 붙여놓은 것처럼, 엄마의 열 손가락과 노트북 자판 또한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한결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니 말이다.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던 그때 나는 내 시간을 어떻게 쓰며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쓰는 사람이 되어 있다. 엄마의 삶이 너무나 투명해 엄마를 궁금해할 수 없었던 아이가 엄마의 낯선 시선이, 돌부처 같은 엄마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첫 글쓰기의 시작은 일기에서부터였다.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 시절 그림일기서부터 중학교 1학년 때 단짝 친구와 교환일기, 이후 혼자서 비밀일기장에 온갖 비밀들을 끄적였던 것까지 하면 꽤 오랜 세월 글을 썼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때의 조각난 글들은 대부분 나를 투명하게 비추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글쓰기 상에 눈이 어두워 엄마에게 대신 글을 써달라고 졸랐다. 어른의 정갈한 글씨체에 어른스러운 글 솜씨로 뻔뻔하게 글쓰기 상을 수상했다. 상장을 모으면 모을수록 내 능력과 실력이 올라갈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던 시절. 모으려면 책이나 좀 모아 읽지. 쯧쯧.


세월이 좀 흘러 상장을 모으는 일에 회의감이 들 무렵, 친구와 교환일기를 썼다. 투명하게 나를 비추지 못한 글을 쓰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된 건지, 교환 일기 속 ‘나’라는 주어로 쓰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일기 속 나는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 포장되고 있었고, 그것을 쓰고 있는 나는 일기 속 ‘나 ’ 뒤에 숨기 바빴다. 일기 속에 나는 내가 해보지도 가보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걸 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지, 질투와 부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가 나는 그렇게 생겨 먹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두렵다. 혹시 내가 만든 나를 내가 조종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만든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학창 시절을 관통하며 쓴 혼자만의 비밀일기장도 나를 투명하게 비추었는지 의문이다. 당시 속상한 감정을 종이 위에 비워내기 내지는 게워내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비밀일기장에는 해독 불가능한 궤변에,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세상에 대한 욕지거리가 한 바가지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겉으로는 세상 반듯한 모범생의 모습을 하고서, 안에서는 세상 요란하게 들끓는 포효 가득한 사춘기 소녀. 다시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다 그 종이들의 무게에 내가 짓눌리게 될 법한 종이 더미. 종이 위에 거칠게 내리 끄적이는 동시에 머리를 백지로 만들어 버리고,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마법과 같은 글쓰기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았다.


일기장에 끄적였던 풋내 나던 그때처럼 지금도 내 글의 대부분은 일상 이야기다. 일기 같은 일기처럼 보이나 일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내 일상에 대한 글을 끄적이고 있다. 내 일상은 대체로 집안과 가끔 집 밖을 배경으로 하고, 인물은 주로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로 이루어져 있다. (쓰고 보니 그야말로 일기장이다) 글감은 이 지지리 궁상에서 불현듯 찾아오지만, 그렇기에 내 일상 모두가 글감이 되기도 한다.


학교 앞에서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며 내 눈길을 끄는 행복의 세잎과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글감이 되기도 하고, 우르르 하교하는 아이들 중 너만 보이는 내 시선이 글감이 되기도 한다. 주말 가족이 함께 본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나눈 소소한 대화가 글감이 되기도 하고, 그 안에 아이가 혹은 남편이 뱉은 한 문장이 글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나조차 이유를 모르는 내 오르내리는 감정의 심연을 파보고자 끄적이기 시작하다 문득 잠잠해지는 감정 세포를 만나기도 하고.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가 눈 위에 손가락으로 그려놓은 스마일 표정이나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홀짝이다 옆에 앉은 커플에게 눈길이 가는 내 시선이 글감이 되기도 한다.


일상을 살아가며 문득문득 다가오는 글감들은 내 손에 쥐어진 폰 사진앨범에 저장된다. 사진작가가 된 듯 찰칵, 그 순간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만든다. 글감이 되는 사진들이 많아지고 있어 최근에는 몇 개의 앨범으로 분류해서 저장하고 있다. 카메라에 담길 수 없는 글감들은 역시 또 내 손에 쥐어진 폰 메모장을 열어 간단히 메모한다. ‘도서관 3층 어떤 여자의 타이핑 소리와 어떤 남자의 코 들이마시는 소리.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경쟁하듯. 인지하고 있을까, 나만 인지할까’ 혹은 ‘엄마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을 들었다.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아이의 배고픔을 생각한다. 간식 필히 준비’와 같은 짧은 메모들이 쌓이고 있다.


쓰는 사람(쓰고 있는 사람)이 되고 나니, 이전보다 사진을 더 많이 찍고 자주 메모를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 것인 순간으로 글을 쓰기 위해 소소한 일상이 빼곡히 저장되고 있다. 언젠가 쓰일 글감의 후보들이 하나둘 켜켜이 쌓이고 있다. 글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 글을 쓰지 않았다면 휘발될 순간들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다. 흘려들었을 아이의 한마디, 건성으로 봤을 애니메이션 영화, 거실 창밖의 눈 내리는 모습, 클래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 등.


며칠 전 아이가 동화책 한 권을 3개월 동안 필사한 노트를 내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필사에 대한 효용을 나열하며 아이의 필사 경험을 공유했다. 필사를 하게 한 실질적인 계기는 아이의 불완전한 맞춤법 때문이었고, 맞춤법뿐만 아니라 운필력, 글쓰기 능력 향상을 기대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나열한 세 가지 모두 기대만큼 향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인할 방법도, 확인하고 싶지도 않기에. 3개월간 작가가 되어 본 경험 그거면 충분했다.


글을 제대로 써보려 마음먹기 전에 나는 주로 필사를 했다. 무조건 따라 쓰지는 않았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손이 가만있지 않았고, 굴러다니는 연필 하나를 잡고 노트에 따라 쓰기 시작했다. 읽고 있는 그 어떤 글이라도 상관없었다. 신문 칼럼을 따라 쓰기도 했고, 도서관 간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하나를 꺼내 읽다 무작정 써보기도 했다. 내 질투심을 자극하는 미친 듯 좋은 문체의 작가를 만나면 그 작가의 책들을 모조리 빌려 읽으며 그 안의 빛나는 문장을 골라 따라 썼다. 대부분 소설책이나 에세이, 산문집들. 나름대로 사유가 깊은 문장을 따라다니며 썼더니, 겉멋 가득한 문장을 쓰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기도 했고, 숲보다 나무를 보다 보니 맥락 없이 따라 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필사는 따라 쓰는 사람에게 그 글을 쓴 작가가 되어 보게 하는 희열을 맛보게 한다. 맞춤법 교정을 위해 아이에게 권유한 필사의 경험이 아주 미세한 나무인 맞춤법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는 먼 훗날 기억해 줬으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사고의 흐름을 세심히 따라갈 수 있고, 따라가다 보면 마주치는 어느 한 표현에서 잠시 머물러 볼 수도 있는 필사. 눈으로 읽다 손으로 쓰고, 손으로 쓰다 잠시 머물러 본다. 머물러 보다 문득 생각에 잠기고,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켜진다. 작가의 문장을 곱씹다 나의 문장이 슬슬 풀려나온다. 이 행위가 반복될수록 쓰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내 삶에 관심 없던 아이가 현재 나를 ‘작가 지망생’으로 알고 있다. 엉덩이를 의자에, 열 손가락을 노트북 자판에 접착제로 붙인 채 살아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난 이미 작가다. 아이에게 이미 엄마는 작가일지도. 아이는 엄마가 작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이미 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아이에게 항상 강조하는 ‘결과보다 과정.’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그 과정은 아름다워야만 한다. 내 모든 일상이 글감이 되는 지금, 그 글감으로 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삶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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