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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15. 2024

내 생애 두 남자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연말 연초 지인들과의 저녁 약속으로 바쁜 남편이 평일의 마지막 날 그리 늦지 않게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빠와 교감의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이에게 남편을 양보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며칠만 제대로 안아보지 못해도 아이는 훌쩍 커 있다며 남편은 항상 놀라워한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낀다. 내 일상에서는 아이의 자라는 성장의 부피감이나 그 속도를 쉬이 인지하지 못한다. 밀착된 관계가 그리 아름답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불문율에 가깝다. 심지어 부모와 낳은 자식 둘 사이 거리까지도.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정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건강한 관계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기본이자 기초, 필수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하루 일상에서 돌아와 아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과 마음이, 어느덧 훅 자라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오롯이 사랑만을 줄 수 있는 그 시선과 마음이 나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     


두 남자는 각자의 일상을 열심히 살고 서로에게 그런 시선과 마음으로 금요일 저녁에 만났고, 그동안의 일상을 서로에게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부엌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매일 켜져 있는 93.1 클래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나는 편안히 나만의 공간, 따땃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한다. 세상 편안한 자세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불현듯 고요하다. 두 남자의 저음과 고음이 오가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하다. 어느새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뭐지? 꿈을 꾸고 있나? 여태 나 혼자 있었던 건가? 두 남자가 미국으로 여행을 간 그때처럼?’ 몽롱한 정신에 바깥 동향이 궁금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오늘 저녁은 아이에게 아빠를, 아빠에게 아이를 서로에게 서로를 양보했으니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고 이불속으로 다시 침잠한다.      


5분이 지났나. 궁금함은 나를 잠에 들지 못하게 만들고, 역시나 두 남자 내가 있는 침실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커다란 하나가 더 커다란 하나에 바짝 안겨 들어온다. 커다란 하나는 더 커다란 하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더 커다란 하나의 두 눈은 붉어져 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건가. 두 사람이 조우한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바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두 남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흐느끼고 있는 것인지. 아들의 사춘기와 아빠의 갱년기 호르몬이 만나기에 아직은 우리 그럴 나이는 아니잖아. 아이도 당신도. 아직은 밝은 기운 내뿜으며 만나면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춰야 하잖아... ‘아직 우리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야."

"엄마는 이해 못 할 거야."


잠을 설치게 만들더니 갑자기 나타나 내 신경을 아니 호르몬을 자극한다. 여전히 활동적인 내 신경 세포와 여성호르몬을..       

   

내막은 이러했다.      

아이는 아빠에게 본인이 글공부로 하고 있는 글쓰기 책 하나를 주고 글 한편을 쓰게 했다. 글쓰기 책에 제시되어 있는 주제 하나를 아빠는 직접 골랐고, 10분의 시간이 주어지고 아빠는 제한 시간을 넘기며 글 하나를 완성했다. 최대한 정성 들여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한 땀 한 땀 글을 써 내려갔고, 아빠는 그 글을 아이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었다. 한 문단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아이는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의 글을 끝까지 정성 들여 읽어 내려갔고, 마지막 문장을 다 읊고 나서야 아이의 눈물을 안아주었다.   

 

사족:

듣자마자 들었던 생각 하나, 대체 어떤 글을 썼길래 이 아이가 감동으로 울먹이게 되었을까? 이어진 생각 하나, 아이의 눈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에게 감동을 준, 남편이 쓴 글이 궁금해지는 나는 뭐지? 모성애를 뛰어넘는 글쓰기에 대한 환장?     


나는 역시나 또 졌다. 두 남자에게 지는 건 내가 이 집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캐릭터가 아니다. 내 운명인 거다. 운명적으로 이 남자를 만났고, 운명적으로 이 아이를 낳았다. 숙명과도 같은 이 운명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들에게 무릎을 꿇어 내가 졌소이다 수긍하고 인정하는 일. 감수성이 참으로 높은 두 남자와 같이 사는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굳이 이기려 들지 말고, 나는 나대로 너네는 너네대로 행복하게 살자.       


 

거슬러 때는 2022년 12월 12일경 밤, 거하게 취한 남편은 톡으로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다시 읽어도 코끝이 시큰거리는 그것을 아이에게 바로 보여주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고 아이는 아빠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아이를 대신해 나는 아빠의 글에 한동안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김동률의 '취중진담'이 들려왔다.


남편은 자주 노래를 흥얼거린다. 특히 자동 에코가 형성되는 욕실에서는 더더욱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른다. 대부분 90년대 발라드 곡. 부모는 곧 환경이라 했던가. 덕분에 아이의 노래 취향은 아빠를 꼭 닮아간다. 조장혁의 '중독된 사랑'을 두 남자는 돌림노래처럼 부르곤 한다. '잊었니, 너와 나 사랑했던 날 모두...'


사실 남편은 연애 전 친구로 지냈을 때부터 내 앞에서 자주 '취중진담'을 목놓아 불러댔었다. 취중이든 취중이 아니든 자신의 진담을 노래에 실어 나에게 보냈다. 목의 핏대의 진하기와 사랑의 농도가 정비례하는 것처럼 그렇게 목놓아 부르던 그. 지금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에 얹어 흥얼거린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자신에게 눈길 주지 않고 글을 써대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흥얼흥얼. 귀가 열려있으니 듣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마음을 보내고 있는지 알면서도 나는 모르는 척 하기 일쑤다.


평소에는 노래에 마음을 실어 부단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만, 거하게 취했을 때 가끔 그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온다. 짧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풋내 나던 시절 내게 고백한 사랑노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고 진한 사랑을. 다행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향해 있지 않는 그 사랑, 부성애. 그것은 아들에 대한 아비의 마음이었다. 그 깊고 진한 사랑의 심연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하게 취한 문장들이 가끔 나를 울린다.


'니'라는 말, 문장 속 훌쩍 커버린 아이, 그리고 아이의 마누라와 아들. 첫째와 마지막에 등장한 너의 그 사람, 나와 아이의 그 사람, 누군가에 대한 생각까지. 나를 사랑했고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렸고, 아이 역시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순간 20년이 훌쩍 흘러버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최선을 다해 온전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빠와 앞으로 그렇게 살아갈 똑 닮은 아들이 함께 어른거린다.


그날 남편이 아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당사자에게 가닿지 못했으나, 중간 간이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자주 저녁을 함께 보내지 못하지만 두 남자는 항상 이어져있다. 매일 사랑의 세레나데를 갈구하는 나와는 다른 종족들임이 틀림없다. 노래를 불러줘도 '네 엄마는 못 알아먹는다'라고 푸념하던 남편은 저와 똑 닮은 아들을 껴안고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교감을 한다.




남편이 쓴 글     


주제: 내일 죽는다면?     


매일 일어나는 5시에 똑같이 일어나서 양치질, 면도,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집안의 쓰레기를 버리면서 자이할머니, 내 엄마와 통화하고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면서 내 사랑 여보와 대화를 한다. 대화의 주제는 우리의 사랑과 미래.

그리고 내 아들 옆에 누워 ‘진찰’을 하고 맛사지를 해준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백전을 이야기 한다. 내 아들은 매일 할 일을 책상에 앉아서 하고 나는 아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메기 매운탕을 먹고 롯데몰 탁구장을 간다. 내 사랑하는 아들과 탁구를 친다. 세 시간 동안. 그리고 집을 와 이순신 장군님의 영화를 아들과 여보와 다 함께 본다.

저녁은 아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치즈 스파게티를 시켜서 먹고, 나는 하이보루 여보는 아사히 생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는 내일 무엇을 하고 5년 후, 10년 후에 무엇을 할지 각자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나와 아들, 여보와 내 엄마를 생각하며 잠이 든다.

꿈을 꾼다. 내일 눈을 뜨면 오늘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리라 굳게 믿고 희망한다. 사랑해 내 아들 너는 나의 최고 아들 사랑이다.


아들에게 보내는 아빠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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