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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08. 2024

너는 글공부를 하여라, 나는 절을 할 터이니...

새해 결심으로 어떤 습관을 계획하고 있으세요?

1월은 새해의 첫 달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불화 조짐의 가능성이 있는 날의 시작이기도 하다. 방학의 시작. 아이의 방학은 전업주부인 엄마에게 재취업에 돌입하는 시기다. 한 학기 동안 아이를 학교에 보내 오전 시간제 보육과 교육을 담임 선생님께 맡겼고, 엄마는 그 시간 동안 휴직 상태로 살림도, 취미도 혹은 성장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향후 있을 독립을 조금씩 준비한다. 아이의 독립과 나란한 나의 독립을 위해. 아이의 자립을 돕는 일에 나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엄마들은 서서히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내 품에 네가 아니구나, 지금과 같이 내 품에 너여야만 해서는 안 되는구나. 앞으로는 내 품에 너를 안는 것이 너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의 씨앗이 엄마의 마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아이와 엄마의 독립이 적절한 시기에 동일한 속도와 파장으로 나란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이상은 언제나 이상일뿐 항상 엇박자다. 아이는 이미 저 멀리 앞서가고 있지만 그 자리 그대로 정체되어 있는 엄마. 혹은 아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먼저 앞서 멀리 가고 있는 엄마. 분명 아이의 자립에 엄마의 독립도 함께해야 함을 인지하면서도 현실 부정 내지 내 아이는 아닐 거라는 착각에 준비도 실천도 하지 않는 엄마. 아이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 환영에 사로잡혀 사는 엄마. 엇박자여야만 하는 아이의 사춘기와 엄마의 갱년기는 하필이면 나란해지고, 아이의 자립과 나의 독립은 나란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서로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엇박자의 평행선을 달리는 관계인 두 사람.


아이와 나 나란히 자기다움을 찾아 나서는 여정에 아이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엄마도 성장하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매번 돌아오는 아이의 방학은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아이를 내 품으로 데려와 충분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 된다. 엄마는 그동안의 휴직 상태에서 이제 재취업의 상태로 변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삼시 세끼 챙기며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너와 함께하는 삶의 시작.


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늦은 알람을 맞춰 느긋하게 아이를 깨운다. 아이의 뼈가 성장하도록 겨울잠에게 아이의 새벽 시간을 양보한다. 겨울 해도 아이처럼 더 자라야 하는지, 평소보다 느지막이 피어올라 잠들어 있는 아이를 더 포근히 감싼다. 그제야 조물조물 아이의 다리를 매만지며 밤새 고요했던 의식을 깨워본다. 나의 최애 요가 선생님의 5분 자기 긍정 확언 명상으로 우주의 기운이 너와 나를 감싸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도 충분히 충만하다.


새해 첫날 힘차게 108배를 했다. 달력의 숫자도 나이의 숫자도 달라져있다. 1월 1일이라는 무게감이 새삼스레 나이를 실감하게 한다. 그 무게감에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하고자 절을 한다. 올해도 무탈하길 바라며. 그리고 올해의 무탈뿐만 아니라 우리의 겨울 방학도 무탈하길 바라며. 1월은 아이 방학과 나의 재취업이 함께하는 새해의 시작이고 그래서 불화의 조짐 가능성이 농후한 달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불화는 우리와 무관하길, 언제나처럼 우리 둘을 피해가길 바랐다. 오호,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불필요한 예감은 굳이 해서는 안 되나 보다.


오늘 아침도 일어나 108배를 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혼미한 정신으로 내 입에서는 폭격이 쏟아질 것만 같다. 나를 향한 포격이면 생채기도, 그것이 아무는 것도 다 내 소관이니 나만 흉지고 덧나면 될 텐데. 내 입에서 발사되는 폭격의 방향은 안타깝게도 나를 향해 있지 않다.


여기 이곳은 너와 나만의 동굴, 우리 둘은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야 한다. 곧 있을 따스한 봄기운을 잘 맞이하기 위해 나름의 인고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매해 우리에게 여기 이곳 인고의 시간이 있었고, 그 덕분에 맑은 기운으로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을 맞이했었다. 동굴 속 적막한 공간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단단하게 뭉쳐있는 실뭉치처럼 우리는 함께 사랑하고 뒹굴었고 함께 춤추고 노래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올해 이 동굴은 우리에게 좁아 보인다. 너의 넓어진 품을 담기에 이곳은 그리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적막할 겨를이 없는 이곳은 너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채워진다. 너의 커지는 덩치, 뻗치는 기운은 점차 나를 압도해 간다. 함께 사랑하고 뒹구는 일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도 마찬가지 언제 그랬냐는 듯 꿈이 아니었나 싶다. 더 이상 둘도 없는 친구는 보이지 않고, 뭉쳐져 있던 실들은 풀어헤쳐져 흩어지고 있다.

내일부터는 어쩌면 108배를 여러 번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지. 내 무릎이 남아나질 않을지도 모른다. 평소 자유롭게 흐물거리던 허벅지는 인생 처음으로 탄탄함을 장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108배 300배 그러다 내 인생 버킷리스트 천 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에게 골방에서 절을 하는 것은 사실 아이와의 ‘과제 분리’의 시작이다. 여기 이곳 아이와 내가 기거해야 하는 동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노래하고 춤추기 위해 나는 새롭지만 오랜 습관처럼 골방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입은 앙다물고서, 두 손은 가슴에 합장하고 오롯이 타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릎을 구부려 이마를 바닥에 찧어 마지막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뒤집는 동작의 반복을 하며. 한때 가슴을 치며 십자가상 앞에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반복적으로 외치던 것처럼. 결혼하고 지금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형식만 달랐지 마음 비우기를 실천할 수 있는 온몸으로 기도 올리는,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 소통’에 나오는 움직임 명상의 일종인 절을 하면서.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나 주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나 절을 하는 것이나, 결국 나 좋자고 하는 것이니. 아이의 자기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길, 나의 자기다움도 찾을 수 있는 길의 시작은 움직임 명상, 108배다. 몸을 고되게 움직여 지금 이 순간에 멍하니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점차 맑아지는 정신을 곧이어 만나게 되는 것. 불필요한 에너지는 사그라들고 꼭 지니고 있어야 하는 에너지는 서서히 채워진다. 누구에게도 생채기를 내지 않고 되레 내 몸과 마음이 맑은 기운으로 충만해지는 절하기는 정말이지 아이와 나의 ‘과제 분리’를 위해 필수적이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떡을 썰겠다는 한석봉 어미처럼, 너는 자기주도학습을 해라, 나는 절을 하겠다는 심정으로. 이 좁은 동굴에서 너는 너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춤추다 다시 문득 만나게 된다면 각자의 세계에서 충실했던 그 부피만큼 서로를 그리워하다 서로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겠지. 따로 때로는 또 같이의 삶을 새해부터 실천하려 한다.


무릎아, 내일도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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