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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01. 2024

나는 나를 사랑하고자 한다

타인을 의식하는 일에서 벗어나 나를 먼저 사랑해 볼까요?

아무도 내게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동안의 내 삶을 증명해 보이라 강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나를 더 증명해 보여야 했고, 내 삶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10년간 내 직함은 '전업주부' 그리고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가 어느덧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제출해야 할 서류 속 부모의 직업란을 마주하고 잠시 아득해진 적이 있었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뭐라고 적는 게 옳은 일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이 낯설고 어색한 말 '전업주부'를 날림체로 써 내려갔다. 꼭꼭 힘주어 쓴 정성 들인 정자체를 그곳에 채워 넣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대체 학교 서류에 부모 직업란이 왜 필요한 것인가? 라며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차별의 언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부모의 직업으로 아이를 판단하겠다는 것인가, 인간의 선입견이 그곳에서는 정당화되어도 좋은 것인가.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지만 참 나랑 다르다’라는 말은 단지 클리셰에 불과하지 않을 텐데, 부모라면 모두 수긍할 그 말이… 아이와 부모를 동일시해서는 안될 텐데... 직업란 하나에 괜히 딴죽을 걸고 싶어 선입견, 정당화 같은 말을 들먹이지만 그럼에도 피할 도리가 없다. 실은 전업주부 이외에 다른 말로 멋지게 나를 포장해 칸을 채우려 했지만 이내 내려놓았다. 펜도 마음도 그 어떤 욕심도.


주부 대신 엄마라는 말을 적고 싶었다. 흔한 말이지만 누군가 태어났다면 존재하는 ‘엄마’라는 말을. 좀 더 내 상황을 잘 묘사할 ‘전업 엄마’라는 말도 쓰고 싶었다. 전적으로 너만 바라보는 엄마, 전적으로 너를 잘 키워내려 직업처럼 임하고 있는 엄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업 엄마라는 말도 그리 적당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내 수긍한다. 이 말에 또 소외될 누군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전업 엄마가 있다면, 부업 엄마도 있다는 것인가? 엄마에 그런 갈라 치기 분류가 웬 말인가. 혹은 엄마가 직업일 수 있는가, 그럼 아빠라는 직업만 갖고 살고 싶다고 누군가는 아우성칠 테다. 전업주부 말고는 별다른 말이 없는 걸 인정하면서도 왜 나는 이 말이 낯설고 어색하다 못해 다른 말로 멋지게 포장하고 싶은 것일까. 증명해 보이고 싶은 내 삶과 전업주부라는 내 삶은 그게 그거인, 좌항과 우항이 동일한 수식에 불과하기에 그런 건가.


전업주부라는 말의 뜻을 찾아봤다.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집안일만 전문으로 하는 주부.’ 여기에는 엄마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아니어도 주부가 될 수 있고, 엄마라면 주부이기도 하다. 밖에서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도 엄마이자 주부이기도 하고, 다른 직업이 있어도 전적으로 집안일을 담당하면 전업주부이기도 하다. 직업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업주부이자 엄마일 수 있다. 요즘은 남편도 집안일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 육아 역시 그들의 몫인 경우도 있다. 엄마이자 주부, 엄마이자 직장인, 아빠이자 주부, 아빠이자 직장인 그리고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라는 구분도 역할이듯, 주부와 직장인도 역할일 뿐. 상황에 따라 혹은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역할.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역할이 불편한 것일까. 전업주부라는 역할. 직업란에 전업주부라고 써야 하는 이 역할에 대해서 왜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을까. 차라리 직업란에 엄마라고 쓰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기도 하다. 엄마라는 역할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존재이니. 엄마가 되면서 나는 타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더 깊이 공감하게 되었으며 생각과 마음이 좀 더 유연해졌다. 내 인생에 부모가 되어 본 경험이 지금껏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어떤 일보다 엄마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다. 그것이 부모로서 책임감이기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나란 인간을 위해서.


그럼에도 나는 줄곧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삶이 흔한 삶이 아니어야만 했다. 엄마의 삶이 흔한 삶이 아님에도 타인을 의식하는 나란 인간은 엄마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집에서 놀고먹으며 소비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내 속에서 나온 편견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강력한 전제가 되어 나를 움츠리게 했다. 흔히들 안부차 묻는 "요즘 뭐 하냐, 집에서.."라는 말이 '애는 얼추 크고 있으니 이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라는 말로 들렸고, 타인을 곡해한 나는 나를 고립시켰다.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 어쩌면 일상에서 꼭 필요한 일을 나 자신이 멸시하고 불편해했다. 흔한 삶이라 치부하는 건 나 자신. 직업란에 전업주부라는 말만 쓰지 않으면 만사형통할 것만 같은 착각. 더 이상 내 삶을 증명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만 같은 오만. 실은 지금과 또 다른 삶을 살아가더라도 불평불만 불만족은 똑같을 거면서. ‘이거만 아니면 만사형통에 무방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닐 거면서. 삶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삶에 곁눈질만 하는,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나. 나를 증명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앞으로 한 발자국도 갈 생각이 없는. 제출해야 할 서류 앞에 푸념만 하는. 


내 삶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코 내 아이가 동원되어서는 아니 된다. 엄마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과 내 삶을 증명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엄마라는 역할에 나는 얼마큼 충실하고 있는가를 먼저 자문하고, 그 충실함은 아이의 성취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그 충실함은 나의 성장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내 삶의 증명이 아닌, 내 삶을 오롯이 향유하고 매 순간 춤출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나를 나는 앞으로 만날 수 있을까. 오롯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만히 살아가는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지금 나의 하나뿐인 삶 속에서 충분히 즐기며 훨훨 춤추며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처럼, 순간을 향유하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타인을 향해 있는 생각과 타인을 의식하는 행동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누군가에게 보이는 내가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그 어떤 이름이나 수단이 아니라,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지하고서.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아이를,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마음에 품고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나는 나를 먼저 사랑하고자 한다. 오늘부터.

나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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