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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29. 2024

습설 설원, 양양에 다녀오다

가족과 함께 한 겨울 여행의 경험

일기예보에는 주말 강원도에 ‘습설’이 온다고 했다. 습설? 여행 가는 차 안에서 습설의 뜻을 아이와 유추해 보기도 했다. 습기가 꽉 찬 눈?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그게 뭘까. 눈은 다 같은 눈일 텐데.. 그 지역의 지형, 날씨 등 지리에 따라 눈의 모습도 달라지나 보다 등 여러 가지 추측이 좁은 차 안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일순간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게 습설이구나!!”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 몇 개를 지나 양양에 가까워져 갈 때 즈음 마지막 터널 하나를 통과하는 순간, 마치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만난 듯 우리 모두 아래턱은 내려가고 동공은 확장됐다.

제대로 눈의 왕국에 도착했다.


나뭇가지 위에 한 치의 오차 없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눈, 강원도 산자락에 일제히 서 있는 침엽수가 두터운 습설로 덮여 있는 모습,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그 어느 곳에도 수묵화들이 즐비했다. 절대 인간은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인간이 뭐야, 인공지능 로봇도 이런 건 절대 만들지 못할 거라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자격지심과 인간의 로봇에 대한 안도감이 함께 느껴졌다. 대자연의 위대함을 또 한 번 느꼈던 날. 한낱 우리 인간 나부랭이는 인공지능을 창조했지만, 대자연은 우리가 감히 모방조차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 한 조각. 아이는 몇 달 전 아빠와 둘이서 갔던 샌디에이고 여행을 떠올리며, 사막 캠핑에서도 대자연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몇 년 전 가족이 함께 갔던 캐나다 나이아가라폭포에서도 우리는 대자연의 장엄함을 느꼈었지..     



한 해의 시작쯤 빼놓지 않고 들르는 양양 낙산사, 그리고 홍련암. 그해의 무탈함을 위해 홍련암에 들러 가족 대표로 나는 매번 108배를 했었다. 그 20분 동안 아이와 남편은 낙산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곳 기운을 받는다. 20분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찰나와 같지만, 108배를 하는 동안 나는 영원을 경험하며 가족의 안녕을 기도한다. 홍련암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만나는 순간.    

  

이번 여행은 친정 가족들과 함께 했고, 단출히 9배를 하고 나왔다. 사뭇 낙산사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져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길에게 길을 묻다’를 보지 못하고 왔다. 하늘까지 닿을 듯 날씬하게 키가 자라 있는 두 개의 소나무 아래 돌로 새겨진 그 글귀를 보지 못하고 돌아와서 안타까웠다.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길을 물으려면 길로 나서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방구석에서 머물러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아이는 한 뼘 더 커져있는 듯 보인다. 아이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르게 움직이는 게 틀림없다. 아이의 일 년과 나의 일 년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의 성장의 깊이만큼 나도 나의 성장에 분발해야 함을 한 뼘 더 자라 있는 아이를 볼 때마다 느낀다. 아이가 ‘엄마도 많이 크고 있어, 나만큼이나!’라는 말을 해마다 들을 수 있길. 내가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듯, 아이도 나의 성장을 바라볼 수 있길. 다른 속도일지라도 누구 하나 머물러 있지 않길. 너를 키우며 나도 커가길.      

     

이번 여행 2박 3일의 숙소는 ‘설해원.’ 남편 회사의 복지는 온 가족을 춤추게 한다. 두 번째로 방문한 이곳은 지난번보다 자라 있었다. 곳곳이 우드로 된 건축디자인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멀리서 우뚝 서 있는 설산을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설해원'이라는 이름도 설악산과 동해 바다란 뜻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번 여행 대자연의 경이로움과 시작하고 대자연의 편안함으로 마무리하는 것 같다.    

  

특히나 ’설해원‘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은 서재다. 책 숲에서 자유로이 헤매고 싶게 만드는 곳. 허기로 헤매다 진짜 허기를 만나는 곳. 허기진 상태로 왔다 더 허기를 느끼며 돌아가는 곳.

아이들용 그림책, 만화책(진격의 거인 등), 문학서적 일반 서적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많았고, 그래서 우연히 운명적인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번 여행의 운명적인 책을 만나기 위해 두 번을 오가며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가져간 책만큼 눈길을 끄는 책은 없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책 두 권. 김민철 여행에세이 '모든 요일의 여행'과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아쉬운 마음에 결국 여행 마지막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얼굴에 대충 물을 끼얹고 주섬주섬 챙겨 서재에 내려갔다. 곤히 자고 있는 가족들을 뒤로하고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서재를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은 진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홀로 고독을 씹을 수 있다는 것도 진리다. 황홀함 가득한 채 서재 공간을 차지한 새 한 마리.          


여행 전날 아이는 탁구채를 준비했고, 남편은 골프채를 준비했다. 설해원에는 커뮤니티 시설로 실내 탁구장과 스크린 골프장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가족은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자칭 초등부 탁구 선수인 아이는 역시나 어디에서나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고,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소싯적 탁구로 누구에게 잘 진적 없다는 할아버지도 아이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올해 칠순이신 할아버지의 전심전력에 모두가 놀라워했지만, 소진이란 모르는 이 맘 때 아이의 에너지와 순발력에 모두가 탄식을 할 수밖에. (이런, 탁구대가 민트색. 어디든 디자인에 충실한 이곳.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디든 작품이...)     


탁구 경기에서 이 아이가 주인공이었다면, 스크린 골프에서 오늘의 주인공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탁구에서의 수치를 골프로 만회하겠다는 심정으로 양 날개를 장착했다. 버디를 몇 번이나 하셨는지. 버디 직전 홀을 향해 공이 굴러가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두두두두 축하의 팡파르를 준비하고 있었다. 팔을 들어 만세를 외치는 친정아버지의 행복한 미소는 온 가족을 편안하게 만든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행복한 미소에 진한 허그로 화답한다. 단단하고 통통한 아버지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마주친다.

함께하는 운동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딱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대빵이 꼭 1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은 불문율. 우리는 서로 눈으로 말한다. 입 아프게 입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18홀을 도는 4시간 동안 한 명만 빼놓고 모두 즐거웠으니, 나는 버티다 버티다 결국 벤치에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다. 그러다 환호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만 내밀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안스포츠맨.

나를 제외하고 이 가족 모두 스포츠맨이 맞다. 내 아이는 4시간 내내 서서 신나 하며 응원했다. 아이의 취미가 탁구에서 골프로 전향될까 걱정되는 건 나만의 일.   


   

짧았지만 모두가 행복했던 여행. 습설을 온몸으로 체감해서 좋았고, 함께 운동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영하 10도의 매서운 칼바람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기에 잠시 움츠릴 수 있다. 타들어가는 여름을 생각하면 지금의 추위가 소중하기도 한 것처럼, 변화가 있기에 내일을 기약하기도 지금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도 하다. 가족이 있어 인생을 살아갈 의미도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기도 한 것처럼. 올해도 가족 모두 무탈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한 발짝 나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그리고 각자 자리에서 충실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다시 또 만났을 때 모두가 더 자라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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