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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Feb 05. 2024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다

무모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대학교 4학년 여름 나는 큰 결심 하나를 한다. 한창 바쁘게 취업 준비나 임용 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다른 경험 하나를 하기 위해 준비했다. 다른 무엇보다 필요했던 마음의 준비. 국토 대장정을 위한 마음의 준비. 각 지역의 대학생들은 지역별로 무리 지어 광주에서 집결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광주까지 데려다준 엄마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한 달 뒤에 달라진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때 그것이 내 인생 첫 경험이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 첫 경험. 그동안 나는 나를 보호하지 못했고, 보호자 아래에서 집 밖은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던 온실의 집순이였다. 그랬던 내가 난생처음으로 온실 밖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 한 달의 여정은 험난했다. 온실 밖은 위험하다기보다 불편했고 고통스러웠다. 시멘트 길바닥에 드러눕는 것은 예삿일. 드러눕다 앉아 도시락을 받아서 입안에 음식들을 욱여넣질 않나, 비를 맞으며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침낭에서 쪽잠을 자다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걷다 무릎에 물이 차서 결국 한의원으로 실려가질 않나. 민폐가 따로 없었고, 난민이 따로 없었다. 군대 가기 전, 뜻깊은 경험을 하겠다고 참여한 동생들은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날들에도 불구하고 이 늙은 병약한 누나를 부축하며 행군을 이어갔다.  

    

그동안 운동 한 번 안 한 내가 어떤 마음으로 국토대장정 완주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건지 지금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하루 10시간 걷는 게 어떤 의미인지,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게 어떤 것을 뜻하는지, 그때 나는 분명 몰랐을 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다. 용감하기 위해서는 무지해야 한다.      


이해받기 어려운 내 결심에 부모님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그것은 내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을 거다. 4학년이 되니 학과 친구들에 비해 한 건 없고, 학교는 그때까지도 마음에 안 들어 낙제만 면하며 다녔으니 내 미래가 암담하다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겨우 생각한 것이 도피성 국토 대정정. 내 나태한 정신을 누가 좀 깨뜨려 달라 아우성을 쳤을 테다. 내 몸을 마구 굴려서라도 내 안에서 뭔가를 깨어나게 해야 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필요했듯, 나도 내 안에 균열을 내야 했을 것이다. 보통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어떤 괴상한 짓을 하면서.   

   

균열이 생길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대장정 후 3개월 뒤 나는 캐나다로 떠났다. 온실의 집순이는 더 이상 집 밖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집 밖은 집 안에 비해 좀 불편하고 좀 괴로울 뿐. 이내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된다. 좀 더 불편하고 좀 더 괴로울지도 모르는, 하지만 내 안에 좀 더 진한 균열을 만들어 낼 낯선 이국땅으로 향했다.          



사실 대학 시절 영어 전공을 하면서 개인과외로 고등 수학을 가르치고 있던 내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결론밖에는. 도피와 회피를 반복하며 살았다고 밖에는. 내 인생 어느 때부터 나는 정면 승부의 순간에서 멈칫 슬슬 꼬랑지를 내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 다녔다. 승부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먹고사는 매일의 순간이 승부일지도 모르는데. 내 속에 오래 아물지 못한 실패의 상처가 승부가 있는 모든 순간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여긴 내가 꿈꾸던 곳이 아니야. 회피할 이유만을 찾던 나는 허상의 세계에 나 아닌 나를 자리시키고 내가 처한 현실을 부정했다. 지금 이 순간에 발 디디지 못하고 허공에 부유하며 살았던 나.      


그랬던 나에게 이국의 낯선 땅 캐나다는 나를 현재의 순간에 살도록 만들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바랬다. 어느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해 지금 여기에 살았다.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지금 여기에 사는 이방인의 삶을 시작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단기 체류 이방인이자, 안타깝게도 단기 함구증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대생, 소피아. 100일간 불가피하게 묵언 수행을 행했다 (귀만 열어놓고 산 것이 3개월). 홈스테이 가족이었던 아일랜드 출신의 젊은 부부는 내가 극도로 내성적인 여자애라 생각했을 것이다. 묻는 말에 자주 극도로 차분한 미소만을 보여줬으니. 그들에게 내가 첫 홈스테이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이후로 다른 학생을 들이지 않은 걸 보니 내가 괜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온 것은 아닌지.      


묵언 수행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지, 아니다. 묵언 수행 덕분이다. 3개월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귀만 예민하게 열어 놓고 산 덕분에 나는 참다 참다못해 입이 터져버렸다. 돌아갈 곳이 있던 내가 타국에서 행하던 묵언 수행 경험만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상 행동까지 하며. 입이 더 터지게 하기 위해, 나는 한국에서 고수하던 것과 다른 정체성 하나를 만들어냈다. 노는 데 빠지지 않는 수다쟁이 푼수.   


매일 저녁 친구들과 식사 겸 술자리를 갖고 미친 듯이 마시고 놀았다. 의도적으로 한국인 친구는 만나지 않았다. 일본, 태국, 타이완, 멕시코, 브라질, 터키 등에서 온 친구들과 수업을 마치면 곧장 펍(pub)에 가서 오후부터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의 페이보릿이 된 ‘스미노프 보드카’를 한 병, 두 병 마시면서. 코로나(맥주 이름이 corona) 맥주병에 레몬 한 조각을 톡 집어넣고 나발을 불면서. 술을 마시면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도 그때의 습관 때문이다. 영어를 쓰기 위해 술을 마신 건지, 술 마시기 위해 영어를 썼던 건지. 느슨해진 혀는 영어를 굴리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무감각한 신경은 자기 검열을 통제하고 멈추게 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아무 말 영어를 시전 하던 그때, 그때부터 나에게 별명 하나가 생겼으니. 그것은 ‘crazy Sophia’     

 

해방된 기분이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았다. 타인을 의식하느라, 타인의 삶에 내 삶을 얹어 사느라, 부재하는 허황된 세계에 나를 데려놓고 사느라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그렇게 옥죄었었다. 마음을 받지도 마음을 보여 주지도 않고 마음이 없는 듯 마음을 삼키며 불투명하게. 하지만 캐나다에서 불렸던 이름 앞에 붙은 ‘crazy’ 덕분이었다. 내가 나를 마음속에 쑤셔 넣고 살았던 불투명했던 삶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난생처음 해방감을 느꼈다. 낯선 이국땅, 나를 아는 누구도 내가 아는 누구도 없는 곳에서 나는 새로 태어났다. 언어는 덤이었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그토록 바라며 치열하게 새로운 나를 만났다. 얼굴이 벌건 채로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 준 자유로운 영혼, crazy Sophia.      


도피성 국토대장정 이후 내 안의 작은 균열이 생겼다. 한 달 뒤에 달라질 나를 만나기 위해 온실을 잠시 떠났던 온실의 집순이는 온실에서 멀리 더 멀리 가보고 싶었다. 온실 밖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고, 불편과 고생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온실 밖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균열은 시작에 불과했고, 균열은 더 금이 가길, 더 갈라지길 바랐다. 작은 균열은 낯선 이국 땅에 나를 데려다 놓았고, 나는 알이 깨지듯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자유를 만끽하며 내가 나를 투명하게 비추었고, 지금 여기에 영원히 존재하길 애원하며 순간을 살았다. 균열이 일어나려면 용감해야 한다. 용감하려면 무지해야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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