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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Feb 12. 2024

자립을 응원하다

시작은 나를 알아가는 공부에서부터

얼마 전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의 ‘나를 알아가는 공부’라는 강의를 우연히 들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이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했다. 공부(工夫)는 체현, 즉 몸을 통과해서 구현되는 것이고 따라서 내 몸에 대한, 나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나를 통과해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공부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나를 알아가는 공부에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것이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는 질문이고, 내 자리, 내 위치, 내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핵심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누구도 독립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지 않았고 홀로 자라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란 다양한 형태의 관계 안에서 다양한 역할로 살아가는 것이고, 특히나 태생적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누군가의 딸 아들로 존재하고, 그 누군가를 우리는 자의로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유전자뿐만 아니라 환경조차도. 향후 우리가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면 내 자식 또한 나와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유전자와 더불어 환경 또한.


나는 내 부모의 자식이고, 나는 내 자식의 부모다. 이 사실은 변함없다.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 그리고 나, 내가 태어나게 한 자식과 나의 관계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종속된 관계에 놓일지라도 그 안에 위치한 각자의 역할은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계는 변할 수 없지만, 역할은 가변적일 수 있다. 내 치열한 의지에 따라. 부단한 노력 여하에 따라. 어떤 딸 아들이 되느냐, 어떤 부모가 되느냐는 의지와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십 년이 넘는 동안 육아를 내 주된 일로 생각하고 해오고 있다. 현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육아였다. 누구에게 손을 빌릴 수도, 빌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 두 손은 자연스레 아이에게로 향해 있었고, 다른 것보다 엄마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모성애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책임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 내가 하기로 마음먹은 일에 대한 책임감. 그동안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일들과는 달라야 하는, 다르게 잘 해내고 싶은 내 의지적 선택인 엄마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을.


그런 마음으로 십 년을 살았다. 책임을 다해 주어진 일을 하듯 가정에서 돌봄과 살림은 나의 영역이라 여기며 지냈다. 남편이 생존의 영역에서 가장의 무게를 매 순간 느끼는 만큼, 나 또한 가정 안 돌봄의 영역에서 생존과 같은 삶을 살았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육아의 삶은 매번 나를 시험하는 듯했다. 아이는 줄곧 내 시선, 손길, 품, 에너지, 시간을 요구했고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내어준 적 없는 나는 허덕였다. 가끔 모성애라는 거대한 신화 앞에 흔들리고 요동치기도 하며. 그럴 때마다 육아서를 탐독했고, 책 속에서 모성애를 발견했다. 책에서 배운 모성애를 하나씩 아이에게 다시 적용하면서 돌봄을 이어갔다. 하루하루 전전긍긍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넘어야 할 산들만 즐비해 보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모성애던 책임감이던, 어떤 이유에서건 최선을 다해 내가 하고 있는 가정에서의 일이 과연 모두를 위해 최선인 것일까라는 의문.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하고 있는 일이 단지 자족에 불과한 허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내 의지로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감이 어느덧 나를 옭아매고 가족을 지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돌봄에 대한 책임감이 지나쳐 모성애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때론 모성애가 지나쳐 나를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지낸 세월들. 최선이 정말 최선이 아닐지도 모르고, 좋은 게 모두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십 년 동안 나에게 남은 사회는 가정만이 유일했다. 가정은 나를 둘러싼 가장 핵심적인 사회이자 그 이상 확장될 수 없는 한계선으로 자리했다. 점차 내가 생각하는 사회와 남편이 말하는 사회의 간극이 벌어져 가는 것을 느꼈고, 나에게 사회는 단지 가정을 뜻하고, 남편에게 사회는 가정을 포함하는 더 큰 영역의 사회를 뜻했다. 우물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래야만 하는 아빠 개구리와 우물 안에 스스로를 자리하게 한 엄마 개구리… 나는 우물 안을 고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물 안에 스스로를 안착시키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져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나 스스로 한계 지으며 자족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게 남겨진 일은 새끼 개구리가 자라 우물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우물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끼 개구리의 자립을 그토록 바랬으니..


가정 내 나의 위치는 결국 남편과 아이를 제외하고는 자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라는 사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동안 한쪽으로 치우쳐진 삶을

살았다는 것이 뜻이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사회 안에서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동료, 누군가의 멘토, 누군가의 멘티로 충분히 자리할 수 있음에도 가정은 나에게 유일한 사회로 여겨졌다. 사회의 근간이 가정임을 뿌리 깊게 새기면서.


내가 선택한 가정 안에서 내가 선택한 역할을 충실히 하려 했듯이, 앞으로 내 의지적 선택으로 확장된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역할을 하며 사회 속에 날 위치시키고 싶다. 아이가 자라는 시기에 맞춰 돌봄 형태가 달라져야 하는 것처럼, 내가 속해있는 사회의 영역도 나를 둘러싼 상황에 따라, 내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치열한 의지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아내와 엄마의 역할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 나서고 싶다. 내 아이의 자립을 응원하듯, 나는 나의 자립 또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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