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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Apr 24. 2024

내 유일한 ‘퀘렌시아'

내 유일한 퀘렌시아, 그곳은 도서관.

오전 9시.

도서관 사서 선생님 한 분이 도서관 건물의 1층 현관문을 열어준다. 가끔 9시 2~3분 전에 문이 열리면 머쓱해하며 눈치를 보다 곧장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그 안에서 뭘 놓고 온 마냥 안으로 성큼성큼.

'죄송해요. 뭘 놓고 온 게 아니라 제 물건을 놓아야 하는 제 자리가 있어서요'라고 눈으로 말하는 중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가방이나 엉덩이나 둘 중에 하나를 빈 좌석에 던지는 행위와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도서관 안으로 성큼 들어간다.

'밤새 내 보금자리가 안녕했는지 제일 먼저 인사하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도 너라는 자리에 고마움을 느껴 제일 먼저 널 안아보고 싶겠지만, 오늘은 양보할 수 없다. 내가 제일 먼저 너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어야 한다.


도서관 안으로 돌진하는 나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꽤 신선했으면 하는데, 결국은 변명 거리에 불과한 것 같다. 내 자리 사수를 위한 의지의 발로일 뿐이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한 지 7년 차. 그동안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거주하는 동네는 달라져도 내 삶의 모습은 비슷하길 바랐다. 내가 사는 집의 공간은 달라져도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은 내 곁에 항시 존재하길 바랐다. 내가 거주할 동네의 첫 번째 조건,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 차로 이동하지 않아도 동네를 어슬렁 거닐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 잠깐이라도 도서관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삶. 그 발걸음은 내 발걸음이기보다 실은 아이의 발걸음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내 손을 끌면서 지혜로 가득한 이 도서관이라는 숲에서 노니는 내 아이를 상상했다. 그런 아이와 매일 손잡고 모이를 찾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우리 둘의 눈부신 발걸음을 상상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책 냄새를 맡고 있는 엄마 참새와 아기 참새.


도서관이 내 아이의 퀘렌시아가 되길 바라며 지낸 세월 동안,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도서관은 아이가 아닌 나의 둘도 없는 퀘렌시아가 되어버렸다. 자식은 부모가 조형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통념이 통념이 아니라 진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아이를 조형하려다 내가 나를 조형하게 되는 우스운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아이는 한결 같이 그때나 지금이나 도서관을 방앗간이 아니라 마치 새장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 도서관 밖으로 내 손을 잡아끈다. 언제쯤 아이가 책 속에서 자유를 느끼게 될까. 책 밖에서도 충분히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어서일까. 내 아이는 진정 '그리스인 조르바'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책을 읽을 당시 자유로운 영혼인 조르바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것 같은데, 나는 왜 내 아이에게 그런 시선을 줄 수 없을까.


그 이후로 나는 홀로 방앗간을 방문하는 한 마리의 참새가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를 간 오전 시간, 혼자서 동네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에게는 도서관이 새장이어도, 새장 속 피와 살이 되는 모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이가 현재 관심 있어하는 분야의 책이나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 빌렸다. 열 권을 선별해 빌려 거실에 펼쳐놓아도 열 권 다 거들떠도 보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이 좋은 걸 나만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빌려다 놓곤 했다. 아이가 제목만 슬쩍 보고 지나치더라도, 그러다 호기심이 일어 슬쩍 넘겨보고 치우더라도 엄마 참새는 스스로 만족했다.


아이의 책을 고르다 어느덧 내 책도 고르게 되고, 아이의 책을 고르는 시간보다 내 책을 고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언제부터는 어린이 열람실을 들르지 않고 곧장 일반 열람실로 날아가서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열람실 내 나만의 애착 자리가 생겼고, 자주 그곳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책냄새를 맡곤 했다. 책을 읽다 말고 잠시 고개를 들어 창으로 보이는 나무의 가지와 잎들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도 하고. '언제 봄이 왔지' '벌써 여름이구나' '이번 겨울은 꽤 긴 것 같다'는 생각들을 하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열람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보통 간이 서가로 향한다. 거기에는 제자리에 꽂히길 기다리는 책들이 더러 있다. 지난밤늦게 반납된 책이나 누군가 그날 그 자리에서 빼서 읽다 만 책들. 곧 있을 사서의 능숙한 정리 손놀림이 있기 전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곳을 훑는다. 요즘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찾는지, 어떤 책에 손이 가다 마는지... 간이 서가에 놓인 책 제목을 보며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사람이 빌렸을 법한 한 가지 주제의 책들이 3~4권 꽂혀 있을 때도 있고, 특정 작가의 소설들이 몇 권 세워져 있을 때도 있다. 육아서 몇 권이 나란히 세워져 있을 때면, 나는 잠시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이자 나의 초보 엄마 시절로 돌아가 잠시 아련해지기도 한다. 재테크 관련한 책들이 여럿 보이면 어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마치 나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간혹 시집이 보이면 그 시들을 읽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혼자 상상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소설책이 꽂혀 있으면 이름 모를 누군가의 취향과 내 것은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을 하기도 한다.


간이 서가를 둘러보다 결국 한 권을 빼내 그 자리에서 읽고 만다. 가져간 책은 결국 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가져온 모습 그대로 집으로 다시 데리고 간다. 가방 속에는 매번 몇 권이 보태져 원래보다 더 무거워진 채로 나는 도서관을 나서게 된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읽어야 할 책도 사실 읽고 싶은 책이었고, 읽고 싶은 책도 곧 읽어야 할 책이 되어버리니까. 내 가방 안에 고이 자리하고 있던 책도 실은 읽고 싶은 책이었고, 간이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책에 잠시 본인의 자리를 내어준 것일 뿐. 세상에 책은 많고, 읽고 싶은 책은 더 많고, 읽고 있는 와중에 더 읽고 싶은 책은 항상 나타난다.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인간은 유한한 인생을 살고, 책은 무한히 존재한다. 무한정 많기도 하고 무한히 살기도 하는 책과 다르게 인간은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필연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도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언제까지 나의 이 유일한 퀘렌시아에서 머물 수 있을까.

유한히 사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언제나처럼 나만의 퀘렌시아에서 무한히 사는 책을 안고 행복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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