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시간이 걸려 드디어 도착한 영국땅. 여행의 시작은 짐 싸기부터다. 아니,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는 그 순간 부터다. 아니, 비행기 안에서 서서히 녹초가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며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고 있는 그 순간부터다. 비행시간이 자그마치 15시간이나 된다는 것을 미리 인지하고서 탑승전까지 여행 준비의 모든 과정을 이어왔지만, 정말이지 탑승 후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아니다 싶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란 것에 대해 가장 뼈저리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 또한 이때다.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비행기 탑승구가 다르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못해 슬퍼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영국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척 가볍다는 거다. 몸은 수시간 좁은 공간에 욱여넣어진 채로 천근만근이지만, 곧 만날 영국을 생각하면 마음은 몽글몽글 구름과 같으니.
와! 드디어 영국땅이 보인다. 갑자기 비행기 안이 분주하다. 그리고 고급진 영국 영어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영국인들은 드디어 자기네 땅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자기네 언어로 드러내며 그 공간을 장악한다. 먼 타국에서 여행을 하고 고국으로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안도감보다 여기는 내 땅이라는 그들의 기세등등함이 더욱 느껴진다. 순간 비행기 안 많은 한국인들이 숨죽여 비행기 창문으로 영국 땅덩이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여행자야. 즉 돌아갈 곳이 있다고. 잠시 너희 문화를 경험하고 돌아갈게. Please be nice!
내 걱정과 다르게 히드로 공항은 양팔 벌려 우리를 반겼다.
"Welcome" 또 "Welcome"
자동 입국 심사 시스템이라 우리는 각자 한 명씩 기계 앞으로 가서 여권을 펼쳐 놓고 여권이 스캔될 동안 얼굴을 비추는 화면을 응시했다. 예전과 달라진 시스템에 사뭇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입국 심사관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무섭게 살펴보는 장면은 앞으로 우리 삶에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입국하면서는 다시 만났다. 무섭지 않은 입국 심사관이 봉쥬르!라고 프렌치하게 내게 인사했다)
이번 여행은 아이 동반이라 패키지 투어 여행으로 정했다. 일정이 여유롭지만 알차게 짜여있고, 단체 버스를 타고 장소 간 이동이 용이했다. 무엇보다 현지 가이드가 곳곳을 함께 하며 현지 역사 문화 예술 등을 설명해 주는 프로그램이라 더욱 우리 셋에게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었다.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남편과 둘이서 자유여행을 했을 때는 어디라도 둘만 있어도 좋았었다. 한국을 떠나 유럽에서 둘이서 손잡고 곳곳을 누비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격하게 동감했을 시절이었다. 이게 런던의 느낌이고, 저게 파리의 느낌이구나... 분위기만 슬쩍 느끼고 온 듯한 느낌적인 느낌. 그렇기에 돌아와서는 정말 사진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진만이 남지 않게, 뭐라도 귀동냥을 하며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길 바랐다. 우리 셋 중에 가장 어린, 지금의 경험이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한 피와 살이 될 아이에게 작지 않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숙소까지 너무나 포근했던 런던.
하루 세끼 정갈한 식사에 매일 만 2 천보씩 걸으며 하루하루 꿈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저녁 8시도 안 돼 스르륵 눈이 감겨 꿈같던 하루를 꿈속에서도 만나는 경험은 정말 꿈만 같은 경험이었다. 그 꿈같은 경험들을 이곳에 하나 둘 살포시 그리고 곱게 풀어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