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1일 차.
포근한 잠자리에서 잠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내 몸은 현재 시차적응 중이다. 한국에서 꼬박 15시간 날아온 이곳 영국 시간에 몸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나뿐만 아니라 두 남자 또한 애쓰는 모양인가 보다. 같은 공간에 우리 셋, 같은 시간에 하나 둘 눈을 떴다. 누가 먼저 운을 뗐는지 모르겠다. 눈을 맞추고 서로 '굿모닝' 아침 인사를 한다. 평소 같으면 새벽형 인간인 아빠로 인해 아이는 평일 아침 아빠에게 아침인사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저녁 인사 또한 아빠에게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이유는 이 엄마의 단호한 생각 하나 때문.
"아들아, 건강이 가장 중요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우선 잠이 가장 중요해. 어서 자자" 우리 집은 8시면 소등에 들어간다.
여행 중에는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영국의 시계에 몸을 맞추느라 행복한 새벽형 인간이 되었고, 우리를 위해 차려진 호화스러운 아침 밥상이 매일 기다리고 있으며 오전 8시면 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자, 지금부터 잠시 일상에서 탈출해 낯선 공간 이곳에서 자발적인 이방인이 되어보는 거야!
여행 첫날부터 영국 스런 날씨에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었다. 연한 잿빛 하늘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리 세차지 않고 부슬부슬. 영국에서 바람막이 점퍼와 우산은 필수다. 현지인이 아닌 여행자에게 말이다. 갑작스러운 비에 대비할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바람막이와 우산은 우리 여행자들에게 필수일지 모르나, 현지 영국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정도 부슬비는 피부에 좋은 미스트라 생각하는 듯 그냥 맞고 다닌다. 입고 있는 옷은 젖으면 자동 자연 건조되는 최첨단 옷감으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풋! 그들의 쿨함을 본받아 나도 가져간 우산을 배낭 속에 고이 모셔두리라 다짐해 보기도 했다.
런던 시내로 접어들어 처음 방문한 장소는 버킹엄 궁전. 영국 왕실의 사무실로도 집으로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궁전 앞에 있는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번쩍번쩍한 동상이 눈에 띈다. 영국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라고 하는데, 아이는 대뜸 저게 진짜 금이냐고 물었다. 저게 진짜 금이면 도난당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금속에 얇은 금으로 도금을 했다고 한다. 양 날개가 있어 멀리서 보니 독수리인가 했더니, 황금 천사 브리타니아 여신이라고.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다름 아닌 공원이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 버킹엄 궁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도심 공원이다. 패키지 투어 특성상 내가 원하는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아쉬웠던 곳이 이곳이기도 했다. 갑자기 맑아진 날씨, 하얗고 하얀 구름들 사이 살짝씩 보이는 푸른 하늘 아래 숲과 호수, 그 너머 하늘에 닿아있는 듯한 런던의 상징 런던 아이. 호수에는 오리와 거위가 노닐고 있고, 형광을 머금은 듯한 잔디 위에는 이름 모를 새와 다람쥐가 총총거리며 우리를 반기기도 했다. 이 도심 속 공원은 원래 왕립 공원으로 헨리 8세가 사냥을 하곤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런던 시민의 휴식처라고 한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서 10분 정도 걷다 보면 국회의사당과 빅벤을 만날 수 있다. 런던 시내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니 영국의 날씨가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함께 여행을 한 60대 여성분은 영국의 날씨 때문에 어서 프랑스 파리로 넘어가고 싶다며 날씨가 오락가락할 때마다 불만을 토로하셨지만, 나는 이게 영국이지! 라며 변덕스러운 날씨가 즐거웠다. '빅벤'이라는 시계탑의 이름은 건물을 지은 사람의 이름 앞에 big을 써서 거구였던 그를 나타낸 것이라 했다. 벤이 덩치가 크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이름으로 시계탑이 불렸을까. 그의 몸집 덕분에 시계탑의 모습과 이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인다.
빅벤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여럿 찍고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또 하늘이 파란 얼굴을 드러내보였다. 어느새 먹구름이 걷히고 햇빛의 여러 줄기들이 런던의 엔틱 한 건물과 빨간 버스를 비추고 있었다. 이번 장소는 웨스터민스터 사원. 남편과 둘이서 자유여행을 했을 때, 사원 내부로 들어가 구경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여기서 왕의 대관식이나 결혼식, 그리고 다이애나비의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라 한다. 사원 옆으로 건물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곳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이라고 들었다. 역사적으로 헨리 8세의 이혼문제 때문에 로마가톨릭에서 영국 성공회로 바꾼 이후, 이곳은 성공회 신학교라고 한다.
템즈강을 따라 차로 15분 정도 가면 런던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중심부가 개폐가 되는 다리 위로 두 개의 타워로 이어진 길이 정말 멋스러웠다. 30분간 자유 시간이 주어졌고, 우리 가족 셋은 타워브리지 2층으로 올라가 런던 전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런던의 또 다른 명물, 런던 아이가 꽤 가깝게 보여 아이는 관람차를 타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아이에게 다음 여행을 위해 남겨두라 일렀다. "아들아, 다음에 친구들과 배낭여행을 하게 되면, 꼭 다시 들러 관람차를 타보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남겨 두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사실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건물은 '더 샤드'라는 타워였다. 남편과 내가 2012년 5월에 왔을 때 기억에 남지 않은 건물이었다. 찾아보니 2012년 7월에 개관하고, 2013년 2월 공식 개장을 했다고 하는데,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번 여행에서도 그리 감흥이 없을 건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는 각 나라의 가장 높은 건물의 이름과 높이를 외우고 다닌다. 우리나라 롯데월드타워(555미터) 보다 낮다며 더 샤드(309미터) 앞에서 우월감을 내비친다. 타워브리지 앞에서는 대충 포즈를 취하더니, 정작 더 샤드 앞에서는 한껏 행복해하며 양 주먹을 치켜든다. '더 샤드 앞에 서 있는 너를 보니, 더 샤드를 많이 닮아있구나 ㅋㅋ'
이곳에서 가이드는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이곳은 런던의 전통과 현대가 잘 융화되어 있는 곳 중에 하나예요. 전통과 역사가 있는 건축물들 곁에 지금의 현재를 보여주는 현대 건축물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전통적인 런던의 모습이 현대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옛스럽게 고딕양식으로 만들어진 돌로 만든 건축물들 옆에 하늘을 찌를 듯하게 서 있는 철제 유리로 만든 마천루는 얼핏 보면 부조화로 느껴진다. 하지만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타워 앞에 두 손 치켜들고 서 있는 아이를 보니, 새로운 세대와 함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세대도 우리 세대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듯, 새로운 역사도 전통이 있기에 그것을 발판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통만을 고수하는 것도,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켜켜이 쌓인 오래된 전통을 잘 간직하고서 그것을 통해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고 잘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까. 런던이 그렇게 가고 있는 것처럼…
여행Tip
-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타워브리지 2층에 올라가서 템즈강 주변 런던을 조망하는 것도 멋지더라고요.
- 버킹엄 궁전에서 걸어서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거쳐 빅벤과 국회의사당과 웨스트 민스터 사원까지 걸어가는 길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