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2일 차
(코츠월드 버포드 마을, 옥스포드 지역)
눈을 떠보니 새벽 3시. 어제보다 한 시간 정도 시차 적응이 된 듯 보인다. 놀랍게도 이 두 남자 또한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의 장점 중에 하나. 방 한 칸에서 복닥복닥 꼭 붙어서 며칠을 지낸다는 것. 방 한 칸 옆에 겨우 붙어 있는 욕실을 오며 가며 그동안 굳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서로의 몸을 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우리 부부 눈에 여전히 꼬맹이인 아이는 다행히 아직은 자신의 몸을 가리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처럼 좁은 공간에 부모인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거나 불편할지도 모를 텐데... 그러기 전에 더 자주 더 많이 방 한 칸에 복닥 복닥 할 수 있는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번 여행을 하면서 꼬맹이였던 아들이 부쩍 몸도 마음도 꽤 많이 자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 시내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코츠월드(Cotswold)라는 마을로 갔다. 우리 숙소가 히드로 공항 근처라 숙소에서는 차로 1시간 반 가량 걸려서 도착한 곳. 세계 어느 곳이나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갈수록 고즈넉한 전원 풍경들을 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을 듣자마자 얼마나 아름다운 전원이 펼쳐질지, 이름에서 풍기는 그 마을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보통 '월드'라고 하면 world, 세상을 뜻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의 월드 wold, 낮은 고원을 뜻한다고 한다. cot는 중세 영어로 '양의 우리'를 뜻하고. 당시 이곳은 양모산업이 번창하여 양을 많이 키우던 지역이라 지명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이드는 코츠월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면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언급했다. 토마스 모어는 "양이 사람을 죽였네.."라며 당시 농민들의 울분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코츠월드 마을 중 우리가 잠시 들를 '버포드' 지역은 1134년 최초 양모 산업이 시작된 곳. 당시 양모 산업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은 농민들을 몰아내고 너도나도 양모 산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이 사람을 죽였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당시 영국을 풍자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돈이었나 보다. 돈이 사람을 살게도 죽게도 만드니 말이다.
'버포드' 지역에서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한 시간이 채 안 된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중세 고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숍들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책냄새가 가득한 동네 책방을 그냥 지나치는 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Hello"하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코츠월드 지역이 영국인들이 은퇴 후 가장 살고 싶은 로망이 가득한 곳이라 들었는데, 책방 주인을 보니 이곳이 더 좋아진다. 따스한 미소가 가득한 은발의 영국 할머니가 책을 포장하면서 내게 인사를 건넨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저런 책 이야기, 동네 이야기 등등을 나누고 싶었지만 엽서 몇 개와 친구에게 줄 시집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내가 책 선물을 고르는 동안 두 남자는 책방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더니, 책 한 권 발견했다며 보여준다. 얼마 전에 아이와 같이 읽었던 그림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영어로 된 원서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가 원하면 기꺼이 사들고 나오고 싶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엄마도 굳이! 그것이 책이라도! 흥'
점심 식사 후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드디어 '옥스포드' 마을.
오래전 남편과 둘이서 영국을 방문했을 때는 옥스포드가 아닌 캠브리지를 선택했었다. 옥스포드나 캠브리지나 세계적인 대학이 있는 곳이지만, 이번에 들린 옥스포드는 우리 부부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으로 꼽은 곳이기도 하다. 옥스포드 대학은 800년 역사를 지닌 영미권 세계 최초로 지어진 대학이고, 특히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는 정말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학 내에 성당이 있어, 성당 겸 대학이란 불리는 곳이다. 실내를 구경할 수 있고 칼리지에서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할 수 있다. 각 장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어 쉽고 알차게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해 그곳을 견학할 수 있다.
건물 안 곳곳에서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장식들이 많았다. 절에 가서 곧잘 절을 하며 자라오고 있는 아이는 이곳 분위기에 사뭇 낯설어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예수 형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성당에 오면 기도를 하고 절에 가면 절을 하는 엄마의 종교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이에게 살짝 알려주기도 했다. '엄마 필명이 소피아108배잖아. 필명에 엄마 종교 스토리가 다 들어 있어'
무엇보다 아이에게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가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해리포터' 이야기가 여기서 출발했다는 사실 때문. 실내외 곳곳이 해리포터 영화 촬영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분위기가 흡사했다. 해리포터 소설을 쓴 소설가 J.K. 롤링이 옥스포드 졸업생은 아니지만 실제 이 마을에 머물면서 스토리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컬리지 내부 계단의 모습, 식당 안 길게 늘어있는 식탁과 의자들 그리고 해리의 이마 표식까지. 해리포터 이야기 덕분에 아이는 이곳을 훨씬 흥미진진한 곳이라 여겼던 것 같다.
<No Public Entry>
'래드클리프 카메라 도서관'을 지나면서 선명하게 적혀 있는 표지판이 하나 보였다. No Public Entry. 사실 이곳뿐만 아니라 옥스포드 컬리지 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여행객들이 보고 갈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한계선을 그어 놓는 듯한 No Public Entry. 여행객은 물론이고 옥스포드 대학 학생들이 아니라면 그 한계선을 절대 넘을 수 없다는 의미 같았다. 순간 나는 그 신성한 곳에 침입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곳을 무심하게 넘어 다니는 학생들을 보니 묘한 질투가 뾰족하게 샘솟았다.
‘세계 각지의 인재들이 이곳에 모여 수학하고 있겠지? 영국 수상들 중 13명가량이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출신이라고? 대체 너희들은 어떤 인간들이냐. 너희들은 이곳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내 나이 40이 넘어도 그들이 부러운 걸 보면 나는 아직 청춘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남은 날들을 그들처럼 충분히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이 꿈만으로 몽글몽글 흩어질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꿈꾸며 살아가고 싶다. 현실이란 게 지닌 꿈을 닮아가는 것이니까.
아들아, 너는 어떤 꿈을 꾸고 있니?
여행 Tip
- 코츠월드 마을 중 버포드 어느 카페에 들어가 크림 커피와 스콘을 드시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버포드 마을에 있는 아기자기한 숍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크답니다. 책방에서 원서로 된 시집을 구매해보는 것도 좋아요.
- 옥스포드에서는 꼭 크라이스트 처치 내의 오디오 가이드를 꼭 받으시길 바래요.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어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답니다. 또 해리포터의 영감이 된 곳들을 찾으며 다니시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