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담행 숲여행, 계족산 황톳길, 대청호 명상 정원, 숲의 인문학
처음에는 생소하게만 들리던 '어싱(grounding/earthing)'이란 단어가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 요즘은 공원은 물론이요, 아파트 정원에도 짧게나마 황톳길을 만들어 놓고 많은 사람들이 걷고 또 걷는다. 실제로 맨발 걷기를 하면 발과 종아리 근육이 생기고 균형이나 자세 개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뇌의 감각까지도 활성화시키고 수면 개선과 통증까지 감소시킨다고 하니 따라 걷지 않을 수가 없다.
한참 전, 어느 회사 사장님인가가 계족산 임도에 황톳길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좋다는 말을 들었었고 또 대청호의 멋진 사진들을 보고는 한 번은 다녀오고 싶었다. '소담행(소소한 이야기가 있는 여행)'에서 주최하는 숲여행은 대전 계족산 황톳길과 대청호 명상정원을 걷고, 문인협회에 등단한 시인과 직접 만나 시를 읽고 또 지어보기까지 한단다. 숲의 인문학이라니!
오전에는 개일 거라던 예보가 있었는데도 며칠 전부터 내리던 비는 영 그칠 생각을 안 한다. 평일인데도 고속도로에는 차가 한가득이다. 쭈그러지는 마음을 비 내리는 멋진 호수를 떠올리며 애써 다독였다. 다행히 비는 그쳤고 안개가 산허리를 감싼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가슴이 뛰고 옷깃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상쾌했다.
비 오는 날은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문구를 읽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라도 걷고 싶었다. 냉큼 양말과 신발 속에 꽁꽁 갇혀 있던 발을 진흙 속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진흙이 발가락 사이로 마구 들어왔다. 미끄러운 데다 질척거리는 진흙 속에 숨어있는 작은 돌멩이나 나뭇잎을 밟았다가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흙과 발은 하나가 되었다.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건강한 기운이 조금씩 퍼지는 것 같았다. 가슴에 쌓였던 걱정까지도 빼버리겠다고 욕심껏 다리에 힘을 주어 본다.
길에는 '선양소주'라는 현수막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로 이 계족산 황톳길을 만든 회사인 듯하다. 그 회사는 2006년에 14 킬로미터나 되는 임도에 황톳길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매년 봄가을이면 황토를 다시 쏟아붓고 자원봉사자들은 또 그 길을 다듬는다고 한다. 실제로 길을 걷다 보면 길 옆에 황토가 많이 쌓여있고 입구에는 관련 기계도 눈에 띄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세상은 아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
빽빽하게 들어선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뿜어대는 피톤치드 덕분인지 산새들의 노래 덕분인지 차츰 마음이 고요해지고 숲에 빠져들었다. 산림욕장이며 유아 숲체험장 등 쉴 곳도 많아 굳이 맨발 걷기가 아니라도 즐길 곳이 많다. 계속 들려오는 물소리도 좋고, 지칠만 하면 들려주는 나무에 대한 해설도 흥미롭다.
가다가 예쁜 녀석이 보이면 네이버에 물어 하나하나 이름을 알아낸다.
담쟁이덩굴 앞에서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참나무 앞에서는 엘프리드 테니슨의 '참나무'라는 시를 낭송해 보는 시간 또한 신선했다. 담을 타고 다녀 '담쟁이'라는 이름을 얻은 녀석은 때로는 타고 넘어간 식물의 광합성을 막아 식물을 죽게도 하고, 페인트 칠한 벽의 페인트까지도 떨구게 한다. 하지만 담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은 예쁘기만 하다. 시인은 담쟁이가 담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우리네 힘든 삶을 보았다.
나무들 이름 중에는 '참'자가 붙은 것은 이로운 식물이요, '개'자가 붙은 것은 쓸모없는 식물이란다. 실제로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은 참나뭇과에 속하는데 도토리가 열린다. 아마도 먹거리가 없던 시절 먹거리를 주었기 때문에 '참'자를 붙이지 않았나 싶다.
참나무와 소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은 수피와 나뭇잎을 눈여겨보면 되는데 참나무의 잎은 짧고 까칠까칠한 데다 찌르는 느낌이 있다.
엘프리드 테니슨의 "내 인생을 살라"는 말에도 깊이 동감하게 된다. 화려한 시절 다 보내고 나뭇잎 다 떨구고 몸통만 남아있는 나무도 저리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길에는 밤과 도토리가 많았다. 몇몇 사람들은 걷기보다는 제 집을 뛰쳐나와 앙증맞게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줍기에 바쁘다. 봉지 가득 주은 사람도 있다. 아, 그런데 주워온 것들을 고이 모아놓은 것을 보고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글귀가 떠올랐다. "도토리와 밤은 다람쥐에게 양보하세요."
멋진 숲의 사진을 찍다 보니 모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이런 포인트에서 인증숏을 찍어주었을 게다.
계족산 자락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대청호다. 1980 년 다목적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대덕군과 청원군의 앞글자를 따서 대청호라 했다. 호수는 금강의 물줄기로 대전 청주 일대를 잇는 생명수 역할을 하는데 저수량으로 보면 국내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잔잔한 호수만 보면 그저 풍덩 빠지고만 싶다. 말랑말랑 해진 마음 때문에 또 그 모습을 담느라 발걸음이 차츰 느려진다. 수몰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물가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물속에 잠겨 있다. 데크 입구에 자태가 예사롭지 않게 서있는 나무는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왕버들(?)이다. 수피가 돌고 돌며 올라간 모습이 장관이다.
날씨가 좋으면 맑은 하늘과 함께 구름이 물 위에 둥둥 떠있었을 것을, 아침에 왔더라면 물안개가 끼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멋진 풍경 앞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욕심을 내고 있다.
호수가 얼마나 큰지 데크길 한 바퀴 도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며 자신들이 애송하는 시구를 돌아가며 애송해 보았다. 호수 앞에서 시를 낭송하다니 그 옛날의 감성이 훅 몰려온다.
명상정원에서는 그저 말이 필요 없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모습도 녹음과 물이 어우러진 모습도 최고다. 물 한가운데에 꿋꿋하게 서있는 저 나무는 누구 집 마당에 있던 것일까? 맨발 걷기로 맑아진 마음은 어느새 대청호에 빠져버렸고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는 나무를 시샘하는지 끊임없이 잔물결이 몰려오는 모습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좋다.
데크 끝에서 만난 새 한 마리는 끝없이 지저귀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도 꿈쩍도 안 한다.
오늘 비로 가을이 부쩍 가까이 다가올 것 같다. 군데군데 보이는 단풍잎이 한두 주 뒤에는 온통 빨갛게 될 것이다. 화창하게 해까지 비친다면 얼마나 예쁠까?
마지막 행선지는 동네 책방이었다. 신인문학상 등 수상경력이 많은 시인 '손미'선생님과 만나는 시간이다.
학창 시절 시를 읽어보기는 했어도 써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배추의 마음, 빗방울 등 몇 편의 시를 낭송해 보고는 오늘 다녀온 풍경 중 자기와 가장 닮은 모습을 떠올려 보란다. 막상 그 모습을 떠올려 봐도 시구까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시인은 나 자신이 그 나무가 되어 느낌을 이야기해 보란다. 그저 몇 가지 이야기했을 뿐인데 멋지게 은유법으로 풀어낸다. 이렇게 시가 만들어지는구나. 연습을 하다 보면 나도 한 편의 시를 쓸 수는 있을까?
많이 걷고 많이 생각한 하루였다. 맨발 걷기로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색다른 맨발 걷기나 가을 산행 그리고 호수 둘레길을 걸어보고 싶다면 인문학과 함께 하는 소담행 코스를 권해본다. 또 1박 2일 코스에는 장태산 자연휴양림까지 다녀온다고 하니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메타쉐콰이어 숲은 또 얼마나 멋있을까? 눈 깜빡하면 가버릴 가을 놓치지 말고 진한 추억 만들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