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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Nov 19. 2019

청년의 자살.. 공포와 절망은 누가 만들었나?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20>>


1. 청년의 자살


1992년 4월 15일


서울 수유동 한 주택에서 21살 이 모 씨가 목 매 숨져있는 것을 이 씨의 아버지가 발견했다.


21살 청년의 자살은 누구든 충격으로 받아들일 일이었지만, 이 씨의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예상된 결행으로 올 것이 왔다고 느낀 것이다.


다만 가족들조차 극단적 선택을 막을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가 겪은 고통과 공포를,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씨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5살 때 식도협착증이라는 병을 앓아 서울대 병원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했고 이후에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가벼운 질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겨낼 만한 어려움이었고, 큰 문제없는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1987년 1월 7일 새벽이었다.



2. 응급실에서 무슨 일이..


당시 16살이던 이 씨가 집에서 갑자기 피를 토해, 놀란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에서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의료진들은 먼저 혈액 800cc를 투여한다. 수혈할 때 늘 그렇듯 혈액형 검사와 교차반응 검사를 서둘러 실시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본 뒤 이 씨의 몸에 혈액을 넣었다.


이후 두 차례 더 수혈을 하고 응급수술을 끝내자 이 씨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다.


위급 상황을 벗어난 것에 이 씨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 모두 감사하는 마음이었음은 물론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다들 생각했고, 아찔했지만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될 즈음.. 몇 년 뒤 이 씨는 충격적인 연락을 받게 된다.


에이즈 감염이 의심되니 검사를 받으라는 날벼락이었다.


느닷없이 에이즈 검사라니... 그 날 새벽 이 씨를 살린 바로 그 혈액이 문제였다.


이 씨의 몸에 들어간 혈액은 그 전해인 1986년 10월, 20대 초반 남성이 헌혈한 것이다. 이 남성은 1988년 11월에도 헌혈을 했는데, 이때 적십자사 검사 결과 에이즈 감염 혈액으로 판정받은 것이다.  



3. 도대체 에이즈 검사는?


왜 같은 사람이 1986년에 헌혈했을 때는 문제가 없다가 1988년에는 에이즈 감염 혈액이 된 것인가? 2년 사이 이 남성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고 에이즈 환자가 됐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에이즈에 감염되기 전에 헌혈하고 수혈받은 것이니 문제없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헌혈에서 에이즈 검사가 의무화된 것은 1987년부터다.

즉 그 이전에는 아예 에이즈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씨에게 투여된 문제의 혈액은 1986년에, 그러니까 에이즈 검사 전면 실시 이전에 헌혈된 혈액이었고,,, 그러니까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인지 아무도 모른 채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적십자사는 당황했다.

설마 했지만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씨는 1991년 11월 에이즈 감염자로 최종 판정받았다.


결과를 통보받은 이 씨는 누구나 상상하듯 충격과 공포와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다.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고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나 빠졌다고 한다.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했고 급기야 1992년 4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씨의 사후, 가족들은 국가와 대한적십자사와 서울대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국가와 서울대병원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대한적십자사만 충분한 검사를 실시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며 1천2백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결코 1200만 원의 배상으로 끝날 일은 물론 아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되는 충격의 경험이지만,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은 이후 끊이지 않는다. 모든 헌혈 과정에서 에이즈를 검사하는데도 그런 비극은 이어졌다.  



4.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1989년 5월 20일

고대 구로병원에서 한 여성이 자궁 관련 시술을 받은 뒤 과다 출혈로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병원은 수혈을 했다.  

며칠 전인 5월 16일 서울 신림동에서 한 남성이 헌혈한 혈액을 투여했다. 에이즈 검사가 의무화돼 있었기 때문에, 음성 판정을 받은 안전한 혈액으로 다들 생각한 건 물론이다.


그런데  수혈받은 여성은 에이즈에 감염되고 만다.


당시 혈액 검사는 이른바 효소면역검사법으로 진행했는데, 여기에는 큰 허점이 있었다. 에이즈 감염 뒤 평균 25일은 지나야 에이즈 감염 혈액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16일에 헌혈한 혈액을 20일에 수혈했으니, 에이즈 검사를 했다 한들 잠복기로 인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 검사법은 2005년까지 유지됐다. 2005년 잠복기를 대폭 줄일 수 있는 핵산증폭검사법이 도입돼, 다행히 2005년 이후 헌혈과 수혈로 인한 감염 사례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수혈 에이즈 감염은 29건, 감염 혈액제제로 인한 에이즈 감염은 17건이다.


절망과 공포 속에 극단의 선택을 한 젊은이를 떠올려본다.


아무런 잘못도 실수도 부주의도 하지 않은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과연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수혈 감염 피해자의 소송에서 재판부는 이렇게 말한다.


“...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자의 연령과 주소 등을 알았을 뿐 직업이나 생활관계 등에 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헌혈을 받았으며...


헌혈 시 에이즈 감염 여부 검사를 무료로 해준다는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하여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게 헌혈을 하도록... “


전문가들은 수혈 감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핵심은, 헌혈할 사람에 대한 신중한 질문과 이를 통해 위험도가 높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상도 못 한,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 물론 의학과 기술의 진보로 해결해 나갈 일이지만 안전을 담보하는 시작과 끝은 오히려 사람들의 성의와 노력과 꼼꼼함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에이즈의 경우에는 11일간, C형 간염의 경우에는 23일 정도의 잠복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혈로 인한 질병 감염을 100% 막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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