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을 둘러싼 논란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느닷없는 소동과 혼란이 아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조선인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참혹한 삶을 강요한 일제의 만행에 우리는 분노하고 외쳐왔지만, 그 긴 과정에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들은 오히려 간과한 면이 없지 않다.
위안부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고 싸워온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출범한 것은 1990년, 그러니까 해방 뒤 무려 45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다. 정대협의 탄생이 위안부 문제의 공론화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2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자들이 상처를 안고 살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45년 동안 이 피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모르는 척했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피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1990년 정대협의 출범 그리고 이듬해 고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바로 위안부 피해자”라고 첫 증언하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가 꽁꽁 감춰져 온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명인지 변명인지 아니면 설명인지 모를 하나의 응답을 우리는 고 김종필 전 총리의 회고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제(위안부 문제)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일본의 잘못을 덮어주자는 뜻도 아니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암묵적 분위기였다. 당시(1960년대) 위안부들은 참담한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인간 이하의 최저 나락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온몸과 마음에 상처뿐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아직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젊었다. 처참한 고생을 겪은 뒤 겨우 고국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들의 과거사와 상처를 꺼내는 것은 2중·3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김종필 회고록 소이부답)
한마디로 피해 여성들을 위해 상처를 외면했다는 말이다. 비단 김종필 총리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식민지 여성에 대한 범죄를 어떤 시각에서 대처해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논리다.
‘피해자를 위해 피해를 덮었다’ 이런 주장의 진정성을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할까.
1950,60년대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징용자가 급여를 받지 못한 차원으로 우리 측 대표가 언급했다는 사실, 한국전쟁 중 한국군에서도 그리고 미군 기지촌에서도 ‘위안부’라는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가 ‘국가관리’라는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을 차용한 역사 등은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해진다.
과연 피해를 덮어둔 것인가? 아니면 피해라고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가?
피해를 피해로 공인하지 않은 사회는 결국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게 된다. 피해와 피해자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니 피해자들은 내가 과연 피해자인지조차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렸고, 피해를 숨기고 홀로 감내하도록 만든 게 1990년까지 한국 사회의 현실이었다.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당신들을 위해 묻어뒀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최악의 2차 가해였다.
돌이켜보면 피해자를 숨죽이게 한 억압 구조가 뒤늦게나마 균열된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보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5년 일본에서 한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이 알려졌다. 전쟁 중 오키나와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조선인 배봉기 할머니가 일본에서 추방될 처지에 몰렸다는 고통스러운 삶이 소개된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 내용을 거의 몰랐지만 유독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다.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는 1980년 직접 오키나와로 가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고 그 외에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태 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1990년 1월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를 한겨레 신문에 연재한다.
윤정옥 교수는 이렇게 '나 홀로' 진실 추적에 나선 “내 나름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44년 12월 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1학년 때 일제가 한반도 각지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여성들을 마구 정신대로 끌어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학교를 자퇴해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그 무렵 내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일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불쌍한 또래 여성들에 대한 미안함, 결코 잊지 않고 알리겠다는 사명감,,,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된 놀라운 변화는, 이런 누군가의 진정한 공감과 다짐이 만들어낸 역사였다.
흔히 정대협 출범 이후 위안부 운동 30년을 말한다. 그러나 위안부 운동은 1990년 정대협 출범 이후가 아니라 정대협 출범 이전이 훨씬 지난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일본과 맞서 싸우는 건, 힘겨워도 힘을 낼 수 있다. 일본과 싸울 수 있는 지점까지 한국사회가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고통스럽고 본질적인 과정이었다. 생각해보라. 피해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그 세월 동안 어떻게 피해자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겠으며, 일본에게 반성하라고 싸울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지난 30년 동안 반성 없는 일본을 규탄해왔다. 그렇다면 그 이전 45년 동안 침묵해온 우리 사회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에 반성을 당당히 요구하기까지 왜 무려 45년의 세월이 필요했는지, 위안부 피해자를 피해자로서 우리 사회가 인정하고 존중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기까지 왜 45년이 걸렸는지...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